‘전승국의 입장에서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를 무대로 식민통치 피해배상을 받아내겠다’던 한국 정부의 당초 전략은 미국과 일본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미국은 과도한 대일 청구를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함과 함께 한국을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에서 배제함으로써, 또 일본은 제1차 한일회담에서 한국을 상대로 식민통치 관련 배상금으로 46억 8300만 달러를 청구하는 적반하장격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의 배상청구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번 기사에서는 제2차 한일회담 당시 미국이 한일관계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기자 주>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6일 제3차 한일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보름만인 10월 21일에 결렬되고 말았다. 이 회담이 제1공화국 시기에 열린 마지막 한일회담이었다. 아래의 내용 중 사실관계 부분은 국사편찬위원회 박진희 연구원이 역사 학술지인 <사림> 25호에 기고한 논문‘한국의 대일정책과 제1차~제3차 한일회담’을 인용한 것이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금액 46억8300만 달러를 포기할 터이니, 한국도 일본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금액 22억 달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식민통치와 관련하여 일본 자신도 손해를 보았다면서, 한국측 청구권과 일본측 청구권을 상호 포기하자는 것이었다. 솔로몬의 재판에서 가짜 엄마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하겠다.
10월 15일에 한국이 일본측 제안을 거부하자, 이때부터 일본측 대표인 구보타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의 망언이 시작되었다. 구보타의 망언은 한일관계에 관한 그 자신의 역사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후 회담은 청구권 문제나 어업문제보다도 구보타의 망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이 일본의 협상전략에 철저히 휘말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구보타 망언 중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한국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 이전에 독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구보타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하였다. 대신, 그는 자신의 발언을 이렇게 수정하였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에서 볼 때, 한국이 독립한 날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이다."
구보타는 일본과 전승국간의 샌프란시스코강화 조약에 의해 한국이 비로소 독립되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승인에 의해 한국이 독립되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지 않았다면 다른 나라가 한국을 점령하였을 것이고, 만약 그렇게 되었으면 한국이라는 민족은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에게 은혜를 주었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국에게 은혜를 주었다"
이 발언이 문제가 되자 구보타는 “이런 문제는 건설적인 것이 아니라서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면서 “이 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며 끝끝내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의 망언은 이 외에도 더 있지만 망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망언 이후 일본과 구보타가 보여 준 태도다. 한국 국민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발언을 해 놓고도 일본과 구보타는 발언을 취소하기는커녕 발언 취소를 조건으로 대한청구권 포기까지 연계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여 주었다.
김용식 주일공사가 “구보타의 견해는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인가?”라고 따지자 구보타는 “정부의 훈령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본인의 발언은 공적 자격에서 한 것”이라면서 한국측의 신경을 더욱 더 거슬렸다.
한국이 발언 취소를 요청하자 그는 “국제회의에서 일국의 대표로서 행한 발언을 철회하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발언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맞받아 쳤다.
한국 정부가 1953년 10월 21일 회담 결렬을 발표하자, 같은 날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한국이 일본 대표의 ‘사소한’ 발언 몇 마디를 문제 삼아 회담을 결렬시켰다”며 한국을 비난했다. 그리고 회담 결렬 이후 미국이 일본에게 발언 철회를 권유하자, 일본은 구보타 발언의 취소와 대일 청구권의 포기를 연계시키려고까지 하였다. 한국이 식민통치 손해배상을 포기하면 구보타의 발언을 취소하겠다는 것이었다.
위와 같이 제3차 한일회담 역시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한국측은 회담장에서 대일 청구권을 제대로 주장하기는커녕 일본측의 계산된 전략에 철저히 휘말려들고 말았다. 일본측의 비위에 맞는 ‘이승만 대타’ 박정희가 등장하기 전까지 한·일간 식민통치 배상문제는 그렇게 표류 상태로 남게 되었다.
일본 '구보타 망언' 전략에 말려든 한국
그럼, 제1공화국 당시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식민통치 손해배상을 받아내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크게 다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의 일본 비호 때문이다. 한국은 당초 ‘전승국의 입장에서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를 무대로 식민통치 배상금을 받아내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미국의 대일 전략이 수정됨에 따라 그 같은 한국 정부의 계획에도 수정이 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청구를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을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배제하였다. 이 같은 사정을 배경으로 한국은 손해배상이라기보다는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으며, 또 ‘전승국’ 지위를 포기한 채 상호 대등한 지위에서 3차례의 한일회담에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수사관(한국)과 피의자(일본)가 상호 대등한 지위에서 조사실 테이블에 앉는다면 거기서 어떤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한일회담은 그런 무대였다. 그리고 조사실에 들어가는 수사관의 계급장(우월적인 전승국 지위)을 떼어버린 경찰서장은 바로 미국이었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미국은 외형상으로는 중재자의 포즈를 취했지만, 한·일 간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희망하기보다는 한·일 양국의 분쟁이 미국의 동북아 전략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양국간의 분쟁을 적절히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둘째, 일본의 협상전략 때문이다. 일본이 주도를 당해도 시원찮을 회담이었는데 도리어 일본은 시종일관 한국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일본은 대한 청구권과 망언을 제기함으로써 회담을 완전히 주도하였다.
일본은 한국이 요구한 금액보다 2배 이상 많은 46억8300억 달러를 손해배상금액으로 요구했다. 이로 인해 한국 대표단은 대일 청구권을 관철시키려 하기보다는 대한 청구권을 저지하는 데에 더 주력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일회담에서는 일본측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사실상의 핵심 의제가 되었던 것이다.
또 제3차 회담에서 일본 대표 구보타는 한국 대표단과 한국 국민의 비위를 거스를 만한 망언을 내뱉음으로써 회담 의제를 ‘구보타의 역사 인식’으로 뒤바꿔 놓았으며, 결국 한국측이 스스로 회담 결렬을 선포하도록 유도하였다.
패전국 일본이 오만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후원 덕분
일본이 이처럼 파렴치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후원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패전국 일본이 분노에 찬 한국을 상대로 그런 후안무치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요인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다.
셋째, 한국 정부의 한계 때문이다. 이승만과 친일파에 의해 주도되는 한국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문책을 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 미국 덕분에 권력을 잡은 이승만 정권이 ‘미국-일본-한국 3국 연대로 동북아를 지배한다’는 미국의 전략에 차질을 초래할 수는 없었다. 한국이 일본에게서 식민통치 배상금을 철저하게 받아내려 한다면 이는 누구보다도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도 한국 정부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한국이 미·일 양국의 도움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곤란한 시기에 한일회담 날짜가 잡혔다는 것도 한국에게는 불리한 요소였다.
위와 같은 점들을 볼 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고 또 적절한 피해배상을 받아내려면, 한국이 미국의 영향권으로부터 자율적이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영향권 하에 있으면서 ‘미국과 가장 친한’ 일본으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굴욕적인 한·미·일 동맹이 지배하는 하늘 아래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대일 청구권을 실현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려면, 일차적으로 한미관계를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자유무역협정(FTA), 미군기지 문제 등과 관련하여 한국이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고 한미관계를 합리적 관계로 전환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한국은 ‘한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일본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죄와 배상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조만간 친일파 재산 문제에 관한 새로운 시리즈가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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