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춤춘다 아니 왕의 마음으로 춘다

국립국악원 무용단 공연 <춤의 아버지 한성준의 회향>

등록 2006.09.30 13:57수정 2006.09.3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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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춤의 효시 한성준 일대기를 춤으로 표현한 국립국악원 무용단 가을 정기공연에서 한성준으로 분한 무용수가 왕의 복장을 입고 태평무를 추고 있다. 이 장면은 리허설 때 모습으로 본 공연 때에는 복장의 색깔이 흰색으로 바뀌었다.
근대춤의 효시 한성준 일대기를 춤으로 표현한 국립국악원 무용단 가을 정기공연에서 한성준으로 분한 무용수가 왕의 복장을 입고 태평무를 추고 있다. 이 장면은 리허설 때 모습으로 본 공연 때에는 복장의 색깔이 흰색으로 바뀌었다.김기
왕이 춤을 춘다? 영화 <왕의 남자> 얘기가 아니다. 사실 왕은 춤을 추지 않는다. 적어도 공식 문헌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정재(궁중무용) 중에서 드물게 독무이자 무용수들이 가장 즐겨 추는 춤인 <춘앵전>을 순조 때 효명세자가 창제했다는 기록을 보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춤을 직접 즐기지도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9월 28일과 29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 무용단(예술감독 김영희)의 정기공연 <한성준의 회향>은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 근대춤의 아버지 한성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국립국악원 무용단을 이끌어온 김영희 예술감독의 마지막 무대으로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무대에 올랐다.


우선 국립극장 무용단과 더불어 한국무용의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국악원무용단은 국립극장의 창작경향과는 달리 춤의 원형에 좀 더 치중한다는 특징이 있다. 국립국악원 자체 공연에서 항상 호평을 받는 정제공연이 대표적으로 그렇고, 이번처럼 창작무용이라 할 지라도 그 무용어법이 해체적 창작보다는 원형의 호흡을 고스란히 유지한다는 특성을 지켜왔다.

한성준이 춤을 만들기 위해 겪었던 과정을 반추하는 형식을 통해 그가 생전에 만든 춤들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작품 속에서 '모든 춤은 장단에서 시작한다'는 표제를 붙인 사당패 놀이를 표현한 대목이다.
한성준이 춤을 만들기 위해 겪었던 과정을 반추하는 형식을 통해 그가 생전에 만든 춤들을 다양하게 보여주었다. 작품 속에서 '모든 춤은 장단에서 시작한다'는 표제를 붙인 사당패 놀이를 표현한 대목이다.국립국악원
이번 작품은 김영희 감독이 안무를 했다. 김 김독은 "한국춤과 서양춤의 무분별한 접목이나 분명한 의식없이 적당히 변용하는 것을 경계한다"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춤작품들이 일회성으로 사장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전통창작을 레퍼터리화 하고자 했다"고 덧붙이며 지난해 작품을 다시금 올린 배경을 설명했다.

또한 연출을 맡은 한국예술종합학교 김석만 교수는 "재공연이 훨씬 더 어렵다. 처음 할 때의 신선한 발견을 다시 유지한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면서 "그러나 작년이건 올해건 중요한 것은 한성준의 춤을 무대에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후대 창작자와의 교감을 통해 만들어지는 순환과 반복이라는 한국적 상징고리를 표현하고자 했다"고 연출의 변을 설명했다.

다시 말해 한성준의 춤인생을 재현하는 듯한 구성을 통해서 한국적 철학을 담고자 했다는 것이다. 서양적 논리로서는 리뉴얼(renewal)에 불과한 순환의 현상을 한국적 상징과 원형적 창작이라는 예술방법론을 한성준과 이번 작품의 안무가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기 바란다는 것이다.

본래 혼자서 추는 춤인 태평무를 여러 무용수가 나와서 추는 군무로 변형했다. 이처럼 군무 태평무는 최근 경향이 되고 있기도 하다.
본래 혼자서 추는 춤인 태평무를 여러 무용수가 나와서 추는 군무로 변형했다. 이처럼 군무 태평무는 최근 경향이 되고 있기도 하다.김기
한성준(1874-1941)은 한국춤을 말하는데 있어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살풀이, 승무 등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 계승되는 한국의 대표적 춤도 모두 그로부터 유래했다. 춤 이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명고수로도 이름을 날렸던 그는 근대 한국의 대표적 예술가이자 근대적 창작무용의 효시이다.


전설의 무용가 최승희도 일본인 이시이 바쿠에게 배운 후 한성준에게 입문함으로써 춤의 균형을 갖췄다. 또한 한성준은 최승희 말고도 한국춤의 대를 이을 뛰어난 후예로 딸 한영숙을 두었다. 한영숙에 의해 그의 춤이 다시 후대로 전해졌고, 비록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의 춤은 모든 춤꾼들에 의해 끊임없이 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대단하고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를 묘사한다는 것은 누구나 욕심나는 일이지만 그만큼 어렵고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과거 예술가들의 엄격한 지도방법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한성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엄격한 스승의 모습 뒤에 제자들을 위해 식사 때 일부러 밥을 남기는 따뜻한 인간애를 가졌던 그 마음까지 담아내지 못하는 재현은 복제에 불과하기에 이모저모 쉽지 않은 작업이다.


회전무대를 통해서 회상의 이미지를 구현한 삼일유가 장면
회전무대를 통해서 회상의 이미지를 구현한 삼일유가 장면김기
이번 작품은 '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리'란 상당히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부제를 달고 있다. 현재하는 '나' 속에 존재하는 과거의 '그(한성준)'를 회상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 구조가 이번 작품이 한성준 춤의 복제적 나열이 아니라 한성준이 가진 창작성에 대한 현재화, 개인적 육화로 승화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주는 것이다.

삼일유가(三一遊街.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를 수미일관의 수법으로 채용해 회상의 이미지와 동시에 주제의 상징으로 중복시킨 점은 연출의 백미로 꼽힌다. 이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순환하는 무대에 올라 갖가지 춤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삽화로써가 아니라 기실 모두 한성준에게 춤의 동기이자 또한 결과가 된 것들이다. 그것 외에도 줄타기까지 동원한 사당패의 놀이모습, 일무의 변형 등 춤의 대향연이 볼거리로 제공되었다.

작품 속 한성준은 나레이터와 주제인물로 번갈아 등장한다. 심지어 한성준 스스로의 회상 속 한성준까지도 동시에 등장하기도 한다. 춤만 봐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연극적 기법이 숨겨져 보는 재미를 쏠쏠히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태평무를 출 때에는 왕의 복장을 입은 나레이터에서 전격적으로 직접 그 춤을 함께 추는 동락(同樂)의 한인(閑人)으로 전환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장면만 따로 보면 마치 왕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한성준이 말년에 왕의 복장으로 춤을 춘 적이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재현으로 오늘날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창작에 대한 열정과 갈망이 왕과 같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말년의 한성준이 왕의 마음으로 춤을 춘 장면은 그의 일생을 반추하는데 적절한 채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검무와 급제춤이 한 무대에서 따로 또 같이 어울어진 장면. 급제춤은 검무와 일무를 혼합해 새로운 춤으로 표현한 것.
검무와 급제춤이 한 무대에서 따로 또 같이 어울어진 장면. 급제춤은 검무와 일무를 혼합해 새로운 춤으로 표현한 것.김기
20세기는 전통에 있어서 보전의 화두가 지배했다면, 21세기는 보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승화가 대신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두 차례에 걸친 한성준 돌아보기는 그 승화를 위한 꼼꼼한 채비로 볼 수 있다.

첫날 공연이 끝난 후 중견무용가 채향순씨는 "작년에도 좋았고, 올해는 특히 전보다 더 단아하고 안정된 흐름을 보였다. 한성준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안무의 균형을 잘 잡아서 춤의 운치를 높였다"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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