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과 복사꽃 그 사이의 취생몽사

[서평] 박이화 시집 <그리운 연어>

등록 2006.10.08 18:00수정 2006.10.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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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시(詩)도 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하다. 특히 남성 독자는 등골이 오싹해질까 아니면 "물오른 암여우"에게로 달려가고 싶어 마음이 막 꼴리는 것일까?

아무래도 저 검은 그림자 속엔
몸통 작은 여우 한 마리 살지 싶어
바람난 여자의 음부처럼 팽팽한
물오른 암여우 한 마리
천변만화의 둔갑술을 부리며 살지 싶어
그렇지 않고서야
저 거친 앙상한 골격으로
어찌 저리 미색의 꽃을 피울라고
갈수록 피골이 상접해지는 저 몰골
그럴수록 더 붉고 육색 좋은 꽃 피우는 저 나무,
속엔 분명 변득스런 사향여우 한 마리
色, 色 봄볕 희롱하며 살지 싶어


누구라도 단박에 홀려버리는 향기,
그 화사한 염문
천지간
난분분 난분분 꼬리무는
이 봄날

내 안에서도 분명
저 늙고 의뭉스런 복사꽃 한 그루 있어
마디마디 관절 우두둑 소리나는 마흔에
내 몸은 점점 열에 들뜨고
가끔은 입술보다 더 붉은 손톱으로
꽃잎처럼 선명히
그대 등을 할퀴기도 하는데

-'내 안의 꽃'전문.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박이화 시인의 작품이다. '내 안의 꽃'인 에로틱한 서정을 이렇게도 노골적으로, 담대하게, 질퍽하게 그려놓은 시를 여러분은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박이화 시인은 몸 안의 불(꽃)을 이렇게 몸 밖의 언어로 그려냄으로써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난 봄, 그는 등단 8년 만에 펴낸 첫 시집 <그리운 연어>(애지)를 내게 보내줬다. 봄날이었다. 봄볕과 봄꽃이 한바탕 질퍽하게 노닐고 있는 봄날에 박이화의 첫 시집 <그리운 연어> 받아든 나는 그야말로 '몽유도원도' 속에 살고 있는 듯했다. 꽃빛으로 활활 타오르는 그의 시집이나 그 시집을 읽은 내 몸이 뜨겁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때는 어떤 형태의 독후감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에 다시 그의 시집을 다시 펼쳐든다.


시인 박이화(朴梨花). 필명으로 보이는 이름 속에서 그는 세상(문단)을 향해 나는 꽃이다, 라는 도도한 선언을 하고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始作)한 듯하다. 그와 나는 몇 해 전부터 인터넷 문학카페를 통해 서로 얼마간 알고 있는 사이인데, 박이화 시인은 배꽃(梨花)처럼 하얗고 복사꽃(桃花)처럼 곱다.

그 인터넷 카페에서 그는 이화부인, 도화부인, 취생몽사 등의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이 이름들을 빌려 그의 첫 시집 <그리운 연어>를 말하자면 배꽃과 복사꽃 사이에서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그물로 세상을 건져 올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봄꽃 속에서 '술에 취하여 사는 동안 그 꿈 속에서 죽고 사는' 취생몽사(醉生夢死)의 그물로 세상을 노래한 것은 어떤 것인가?

고백컨대
내 한 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하여
온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질 때까지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

기꺼이

射精(사정)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 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

그가 바로 지난날 내 생애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연어입니다

-'그리운 연어' 전문.


앞서 인용한 시 '내 안의 꽃'이나 위의 시 '그리운 연어'를 보면 노골적이고 음란한 성적 언어들로 시상을 전개해 가고 있지만, 그 내용이 그리 저질스럽거나 음탕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주체와 타자(연인, 세상, 자연)와의 연속성 혹은 합일성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원리일진데, 이는 곧 에로티시즘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박이화 시인은 이 에로티시즘의 그물망으로 세상을 읽고, 또 그것을 언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성적 행위를 암시하는 듯한 시 속의 언사(言辭)들은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연어"인 그대(그리운 연어)를 회억(回憶)하는 간절함으로 동원된다.

이러한 박이화의 시를 두고 같은 지역 대구의 선배 시인 장옥관은 '날 것의 감각, 몸으로 피운 꽃'이라고 명명한다.

"박이화의 시는 몸으로 피운 꽃이다. 몸 중의 몸, 그 중심에 닿아 있는 꽃이다. 뭔가 불편해서 외면하지만 자꾸만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곳. 그곳에서 올라오는 몸의 언어는 힘이 세다. 그녀는 좌사우고, 곁눈질하지 않는다. 직핍이다. 꽃분홍 복사꽃 향기 도처에 낭자하지만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은 시적 자아의 탈은 맨얼굴이다. 그렇다. 몸으로 피운 꽃은 가식이 없다. '이건 속옷인 걸'하고 움켜쥐고 있는 사람들의 손아귀를 가차없이 비틀어버리는 손길은 분명 날것의 감각이다. 매울 '辣'의 날것이다."

그리고 시집 뒤쪽 '해설'을 쓴 이형권은 박이화의 시를 두고 기존 페미니즘 시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여성성을 창조하고 있다고 평한다.

"그녀의 시는 곧 그의 인생이고, 또 그녀의 인생은 곧 그녀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중심에는 언제나 솔직하고 적나라한 성적 이미지와 몸의 감각이 전경화된다. 따라서 성적 감각이 숨김없이 날것으로 제시되는 박이화의 에로티시즘 시는 '풍요롭고 꽉 찬' 언어의 세계다.

새삼스럽게 우리는 성애적 감각을 정신적, 정서적 차원의 인생론과 교합시킬 줄 아는 시인을 발견했다. 그녀의 시는 타인의 몸을 만나 나의 몸이 부풀어 오르고 타인의 마음을 만나 나의 마음이 부풀어 올라, 끝내는 타인과 나, 몸과 마음이 하나로 결합하여 서로가 서로를 꽉, 꽉 채워주는 것과 같은 빠듯하고 절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조년과 황진이의 옛 시조를 차용(借用)하여 우리 시대의 진정한 참사랑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시 '고전적인 밤'이 그것인데 우리 사회의 엉뚱한 엉터리 도덕 윤리의 잣대와 진정한 사랑을 할 줄 아는 풍류남아가 없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송도기생 황진이의 사생활은 만고의 고전인데 신인가수 백모양의 사생활은 왜 통속이고 지랄이야 내가 보긴 황진이는 불륜이고 백모양은 연애인데… 그렇거나 말거나 나는 가을밤 황국 같은 황진이도 좋고 봄밤의 백합 같은 백모양도 좋은데… 좋기만 한데 왜 이 시대엔 벽계수를 대신해 줄 풍류남아가 없고 지랄이야 명월이 만공산할 제 달빛 아래 휘영청 안기고픈 사나이가 없고 지랄이야 아,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길 어이타! 이 몸과 더불어 유장하게 한 번 뒤척여 볼 박연폭포 같은 사내가 없고 지랄이야

봄밤은 고전인데
이화에 월백하는 봄밤은
만고강산의 고전인데

-'고전적인 밤' 전문.


위 시 한 편을 읽으면서 나는 박이화 시인이 펼쳐놓은 취생몽사 애로티시즘의 그물망에 다시 잠겨야 하겠다. 푹 절어야 하겠다. 그러면 내게도 '그리운 연어'를 찾아나서는 새 힘이 생길지도 몰라.

그리운 연어

박이화 지음,
애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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