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자 <조선일보> 1면.
'대한민국 지키는 대결단을'
지난 10일자 <조선일보> 사설 제목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을 이례적으로 1면에 실었다. '북한 핵실험 사태'에 대한 조선일보의 입장이 집약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사설을 꼼꼼히 읽어보면 조선은 현 사태의 원인이 무언지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전혀 엉뚱한 처방을 주문하고 있다. '대한민국 1등 신문'(?)임을 자부하는 신문의 사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조선>, 북한 핵실험 사태 원인 정말 모르나
이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북한이 핵실험을 한 까닭에 대해 단 한 줄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에도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하물며 핵실험 같이 중차대한 일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한 이유가 미국으로 하여금 직접 대화에 나서도록 압박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북한이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통해 얻으려고 하는 것은 '체제안전보장'과 '국교 정상화'이고, 북한이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내놓을 수 있는 건 핵 개발 포기이다.
기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추진했던 장거리 미사일 발사나 핵 개발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지렛대의 성격이 강했다. 물론 북한이 남한과의 재래식 군비경쟁에서 승산이 없음을 절감하고 비대칭 전력을 보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문제는 부시의 미국이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하고 별다른 성과도 없는 6자 회담을 고집하는 데 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측이 제시하는 일괄타결 방안-미국은 북한의 체제안전을 보장하고 국교를 정상화하며, 북한은 핵 개발을 포기하는 방안-이 일면 타당한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미국은 왜 이에 응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 말이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듯싶다. 그 중 손꼽히는 것이, 미국이 북한처럼 불량한 정권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설과 미사일방어(MD)체제의 지속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북한 같은 위부의 위협이 필요하다는 설이다.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모르겠다.
북한의 셈법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거부하는 미국의 속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통한 관계 개선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관계 개선 없이 북한이 이른바 '정상국가'가 될 길은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에 대해 '악의적 무시'로 일관해 왔다. 여기에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가 가해지고, 미국이 북한정권 교체(regime change)를 시도하고 있다는 북한 수뇌부의 의심이 더해지면서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사면초가에 몰린 북한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충격요법이 필요하다고 여겼을 법도 하다.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도, 핵 개발 선언에도 꿈쩍 않는 미국을 직접 대화로 이끌 유일한 수단은 핵실험 뿐이라고 북한 지도부가 판단했을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매우 크다. 핵실험 이후 일괄타결만이 현안을 풀 수 있는 길이라고 북한 고위 관리들이 주장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북한이 체제붕괴의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핵실험을 감행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치밀한 셈법이 작동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상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 중국의 협조 없는 경제제재는 한계가 있다는 점, 북한의 핵 무장이 동북아 전체의 핵무장으로 확산되는 걸 미국이 구경만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 등이 북한의 셈법을 구성한다. 지금으로서는 북한의 셈법이 맞을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원인 분석없이 저주만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북한이 핵실험을 한 최대 이유는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북한이 핵실험을 한 까닭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핵실험에 의한 인공 지진파가 전해진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35분을 기해 북한과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는 끊겼다. 북한의 2300만 주민도 주린 배를 움켜쥐고 기약 없는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야 한다. 북한 핵도박의 결론은 북한 종말의 시작이다"며 북한을 저주하고 있다.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올바른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북한의 핵실험 같이 절체절명의 사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북한이 핵실험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분석도 없이 위기의식만을 조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무책임하기 그지없다.
물론 동기가 어떻든 간에 북한의 핵 실험은 비난받아 마땅한 도발행위이다. 북한 지도부가 무슨 말로 미화하고 분식(粉飾)하더라도, 북한의 핵실험은 자칫 한민족 전체를 공멸의 위기로 몰아넣을 화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실험을 한 원인이 무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조선일보는 "유엔 안보리는 북한에 대한 무력제재까지 가능하게 하는 유엔헌장 7장에 따른 대북제재에 착수할 것이다. 대북 압박은 북한이 핵을 완전히 손에서 놓거나 핵을 쥔 북한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핵에 의지한 북한의 생존전략이 사실은 자살행위였다는 말이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 대한민국을 죽음의 동반자로 끌고 가려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무력제재까지를 포함하는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고강도 제재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조선일보가 북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지만, "대북 압박은 북한이 핵을 완전히 손에서 놓거나 핵을 쥔 북한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될 것", "핵에 의지한 북한의 생존전략이 사실은 자살행위였다"라고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섬뜩한 독기(毒氣)마저 느껴진다. 북한 정권의 붕괴를 간절히 바라는 조선일보의 심정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이라고 해석하면 지나친 것일까?
정작 조선일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 사설의 마지막에 등장한다. 조선일보는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은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되찾고 어떻게 지키고 어떻게 쌓아 올린 대한민국인가. 그러려면 대한민국의 생존전략에 대한 大대결단이 필요하다. 동맹이냐 자주냐 하는 결단을 내려야한다.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 또는 노무현 정권의 결단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결단이어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사즉생(죽을 각오를 하면 살길이 열린다)의 결의로 이 결단의 순간을 맞아야 한다"면서 기염을 토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데 반대할 대한민국 국민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한미)동맹과 자주 가운데 선택을 하라고 국민들에게 종용하고 있다. 모르긴 몰라도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한미)동맹은 미국이 주도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등을 위시한 대북 제재에 한국이 적극적으로 동참해 북한을 고사시키는 길일 것이다.
'자주'없는 '동맹'의 끝은 전쟁
(한미)동맹을 위해 대북 경협과 금강산 관광, 민간 교류도 전면 중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반면 조선일보가 말하는 자주는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대북포용정책의 지속적 추진일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는 (한미)동맹을 지지하고 자주를 증오한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충고를 받아들여 자주를 포기하고 (한미)동맹을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할까? 대한민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에 적극 참여해 해상 및 항공봉쇄에 가담하면 북한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을까? 대북경협을 중단하고 인도적 지원을 끊으면 북한 내 강경파의 입지만 강화시켜 주고 이는 곧 한반도 내의 전쟁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로 귀결되는 건 아닐까?
조선일보의 조언을 따라 자주를 버리고 조선일보식의 (한미)동맹을 선택하는 순간 한반도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올 것이 확실하다. 한반도 내에서의 전쟁이란 민족의 공멸을 의미한다.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조선일보라고 해서 무사할 수는 없을 터이다. 모쪼록 조선일보는 이런 이치를 밝게 깨달아 이제 그만 안보장사를 멈추는 것이 좋겠다. 안보장사도 좋지만 민족의 생존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한반도에 드리는 전운(戰雲)을 걷어내고 북한을 '정상국가'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북미 직접 대화를 통한 일괄타결 뿐이다. 이를 위해 대한민국은 지속적인 대북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의 신뢰를 회복하고,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대한민국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임을 정부와 국민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태경 기자는 토지정의시민연대(www.landjustice.or.kr)에서 협동사무처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자보와 뉴스앤조이, 다음 블로그에도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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