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90주기 추모제

역사적 재평가와 그에 맞는 예우 시급

등록 2006.10.21 09:21수정 2006.10.21 09:21
0
원고료로 응원
a

벌교읍사무소 광장에서홍암 나철선생 90주기 추모제 거행 ⓒ 김성철

홍암 나철선생 90주기 추모제 거행

20일 오전 10시 홍암 나철 선생 90주기 추모제가 보성군 벌교읍 광장에서 박준영 전남도지사, 정종해 보성군수, 이탁우 전남도의회운영의원장, 박오채 추모제집행위원장, 양종현 선양사업추진위원장 등을 비롯하여 지역주민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a

박준영 전남도지사 추모사 ⓒ 김성철

이날 박준영 도지사는 추모사에서 "오늘 홍암 선생 추모제는 우리 전라도에 흐르는 의로운 정신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며 "이제 그러한 인식을 지역발전을 위한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가겠다는 다짐을 선생의 영전에 바친다"고 말했다.

이어 정종해 보성군수는 "홍암 선생은 일찍이 독립운동가로서 민족 종교 창시자로서, 민관외교관이자 계몽운동가로서 오로지 조국과 우리 민족을 구하기 위하여 온 몸을 바쳤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은 그 거룩한 업적과 숭고한 민족정신을 기리고 받들 기념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서 이제야 선양사업을 준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동안 나철 선생의 뜻을 기리지 못한 책임에 대해 박오채 집행위원장은 "우리 지역민들은 서로 각성하고 오늘 추모행사를 통해 반성하는 시간을 갖자"고 말했다.

나철 선생의 일생

a

홍암 나철선생 사진 ⓒ 김성철

나철 선생은 1862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을사오적을 주살하기로 마음먹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꾸몄으나 이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내란죄로 체포되어 10년 형을 언도 받고 무안군 지도에 유배되었으나 나중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게 된다.

1905년 이후 일본으로 수차례 건너가 일본 정부와 천황, 그리고 각 성(省)에 편지를 보내는 등 일본 정계에 '동양평화론'를 바탕으로 한 정치적 독립의 당위성을 따졌다. 1910년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방해가 심해지자 이를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과 평양의 숭령전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교당과 지사를 설치하였으나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나철 선생은 1916년 음력 8월, 김두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하던 중, 8월 15일 광복을 암시하는 예언시와 일본총리 및 조선총독에게 주는 글 등을 남기고 자진순명 하였다.

독립운동과 민족주의의 사상적 맥을 형성하다

a

홍암 나철선생 친필 ⓒ 김성철

홍암 나철을 단순히 대종교를 창시한 인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나철은 망국의 시대에 항일독립외교의 선구자요, 을사오적 처단을 단행했던 의사요, 대종교(단군교)를 중광하여 단군을 구심점으로 한 민족정기의 회복과 광복운동을 주도한 선각자였다.

이후, 선생의 순명을 계기로 대종교인들은 1917년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대동단결을 선언하고, 기미독립선언서의 기초가 되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조선국권회복단이 주축이 되어 3.1운동의 전개, 상해임시정부수립 등 일제 치하에서 벌인 독립운동사의 주역이 되어 나갔던 것이다.

한편 조선 민족 갱생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단군사상임을 강조한 최현배 역시, 이 정신 위에서 한글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우리 민족의 이상을 단군신화에서 찾고 단군신앙의 전개를 설명함과 아울러 훈민정음 창제의 근본정신을 단군의 홍익인간에서 발견해낸 인물이다.

또 문학 방면에서는, 한국 현대시조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가람 이병기나, 소설가 현진건, 홍명희 등도 역시 단군사상의 토대 위에서 저항문학을 전개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1908년 이미 '독사신론'을 발표해 종래의 신라 중심의 사관에서 벗어나 만주를 중시하는 '부여-고구려 정통론'을 들고 나온 신채호 사학 또한 나철의 대종교를 경험한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체계화를 시켜 나간다.

박은식도 홍암의 단군신앙의 경험 속에서 그의 국혼사관을 확립해 간 인물이다. 대종교 중광의 중심인물이었던 류근이 1910년 '황성신문'의 사장 겸 주필을 맡으면서, 그와 절친한 관계에 있던 박은식의 역사관은 더욱 민족주의적 관점으로 변해 갔다.

이 밖에도 정인보는 홍암의 유훈을 받들어 국내에서 비밀활동을 전개한 인물로, 대종교적 영향에 의해 그의 역사정신의 중추가 되는 '조선얼'의 정신사관을 완성했으며 이승만도 신규식 · 박찬익 등과 더불어 의형제를 맺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 역시 그의 사상적 이상의 좌표를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에서 찾았던 인물로, 기회 있을 때마다 "배달민족으로서 대종교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는데 그의 이러한 언급은 국교적 대종교관의 정서를 가장 잘 드러낸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개천절은 '단군교포명서'에 나타나는 '개극입도지경절'을 계승해 홍암 나철이 1910년 개천절이라고 명명하고 기념한 데서 유래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써서 울분을 토로한 장지연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인물이다. 그러나 나철 선생은 그 이전에 이미 이토 히로부미를 꾸짖는 장쾌한 편지를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철 선생은 대종교 중광을 통해 전래의 유교적 폐단과 인습을 혁파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개천절을 부활 정착시켰으며, 선의식을 처음으로 재현하고 당시의 유교적 제례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롭게 홀기를 제정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제천의례를 시현 · 정착시켰다.

a

홍암선생 생가 마을입구에서 박준영 도지사 정종해 군수 등이 선양사업 중요성에 대해 지역주민들과 대화 ⓒ 김성철

종교적 사상적 이념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이제까지의 모든 사상적 · 종교적 · 이데올로기적 편견과 편향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시각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런 선각자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나가야 한다. 그것이 온몸을 태워 이 나라의 독립과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일 것이고, 또 우리 후손들에게는 부끄럽지 않는 세대로써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살펴볼 때 그동안 나철 선생에 대한 평가는 너무도 홀대받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선생을 단순히 대종교를 창시한 인물로만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드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다.

a

정종해 보성군수 홍암 나철선생 생가를 방문 ⓒ 김성철

덧붙이는 글 | 홍암 나철선생에 대해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사상적 · 종교적 · 이데올로기적 편견에서 배척당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아리랑신문>은 창간호(2006.10.2일자)에서 박호민 편집위원이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양사업이 활기를 찾고 있으나,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홍암 나철선생에 대해 그 동안 우리 사회는 사상적 · 종교적 · 이데올로기적 편견에서 배척당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아리랑신문>은 창간호(2006.10.2일자)에서 박호민 편집위원이 특집기사를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양사업이 활기를 찾고 있으나,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7년 만에 만났는데 "애를 봐주겠다"는 친구
  2. 2 아름답게 끝나지 못한 '우묵배미'에서 나눈 불륜
  3. 3 스타벅스에 텀블러 세척기? 이게 급한 게 아닙니다
  4. 4 '검사 탄핵' 막은 헌법재판소 결정, 분노 넘어 환멸
  5. 5 윤 대통령 최저 지지율... 조중동도 돌아서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