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숲 속에서 자연의 일부가 되다

[가을의 빛깔 ②] 저만의 빛깔 가지고 마지막 길을 채비하는 가을

등록 2006.10.23 16:49수정 2006.10.23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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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시여뀌가 가을빛 숨길 듯 내보이고 있다.

가시여뀌가 가을빛 숨길 듯 내보이고 있다. ⓒ 최성수

이제 보리소골은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다. 앞산의 낙엽송은 노랗게 물들어 배추밭으로 바늘 같은 잎을 마구 날려 보낸다. 밭에도 다른 작물들은 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김장으로 쓸 배추와 무만 가을 햇살 아래 짙푸르게 서 있다.


여름의 싱그러움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일 없이 서서 쓸쓸한 가을 풍경을 마음 깊이 담아둔다.

가을이 허전한 것은, 이제 거둘 것 다 거둔 논밭의 텅 빈 자리 때문이기도 하고, 한여름의 쨍쨍한 햇살이 스러진 때문이기도 하다. 결코 스러질 것 같지 않게 강렬하던 햇살이 저렇게 느릿느릿 부드러워질 수 있다니!

나는 가을 햇살처럼 천천히 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을 숲은 고즈넉하다. 발아래 밟히는 낙엽이 내는 소리조차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인삼밭을 지나고, 소나무와 밤나무, 낙엽송이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면, 산 속에 숨어있는 콩밭이 나온다. 몇 해 전에는 고추를 심었던 곳이다. 숲 속에 떨어져 있는 비탈밭이라 병충해도 적고, 바람도 잘 통해 고추 농사가 아주 잘 되던 곳이었다. 그런데 농기계가 들어가기 힘들다고 부치지 않아 묵밭이 되어버렸었는데, 올해는 인삼 농사를 위해 거름으로 쓸 콩을 심었다. 인삼 농사를 짓는 부지런한 이웃 아저씨의 환한 얼굴이, 다닥다닥 열려 바싹 말라가고 있는 콩꼬투리마다 매달려 있는 것 같다.

a 산 속을 향해 난 길, 나는 그저 하염없이 이 길을 걸었다. 가을이 내 곁에서 함께 걸었다.

산 속을 향해 난 길, 나는 그저 하염없이 이 길을 걸었다. 가을이 내 곁에서 함께 걸었다. ⓒ 최성수

콩밭 위로는 온갖 잡목이 우거진 산이다. 나는 솔잎이 두껍게 쌓인 산 위로 접어든다. 푹푹 발목이 빠진다. 그래서 비탈이 더 미끄럽다. 인생도 어쩌면 이렇게 산길을 걷는 것 같은지도 모른다. 한 발이 빠지면 다른 발로 디디고, 또 한 발이 빠지면 빠진 발을 힘들여 빼내 내딛으며 먼 길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 아닐까?


쓰러진 나무 등걸과 앞을 막는 작은 나무들을 툭툭 건드리며 비탈을 오르니,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이 나온다. 임간 도로다. 나는 숲 저 편을 향해 난 길을 따라 그저 걷는다.

고개를 들면, 더 높은 산으로는 이미 잎들이 다 졌다. 발아래 겨울 이불을 잔뜩 마련해 둔 채, 저 나무들은 이제 춥고 시린 길을 걸어야 하리라.


a 용담꽃 피어 깊은 가을

용담꽃 피어 깊은 가을 ⓒ 최성수

a 곰의 쓸개보다 더 쓰다는 용담, 꽃은 그러나 달콤해 보인다.

곰의 쓸개보다 더 쓰다는 용담, 꽃은 그러나 달콤해 보인다. ⓒ 최성수

길가로는 작은 꽃들이 피어 있다. 그 꽃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제 꽃을 닫고, 몸을 말리고, 마침내는 땅 속 깊이 뿌리로만 살아 있으리라. 용담이 곱게 피어있다. 뿌리가 너무 쓰기 때문에, 웅담보다도 더 쓰다고 해서 용의 쓸개인 용담(龍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용담꽃은 파란 색에 가까운 꽃잎을 바람에 쉴 새 없이 떨고 있다.

장구채도, 늦게 핀 제비꽃도, 투구꽃도 가을을 깊이깊이 빨아들이고 있는지, 빛깔이 더 선연하다. 아, 스러지기 전의 모든 것들은 저렇게 더 곱고 더 쓸쓸한 법인지도 모른다. 고려 엉겅퀴라는 본명보다 우리 고향마을에서는 곤드레로 더 알려진 나물도 보랏빛 꽃을 세상을 향해 피어 올리고 있다.

돌아보면 가을은 온통 저만의 빛깔을 가지고 마지막 길을 채비하고 있다. 노랗게 물든 잎, 붉게 물든 잎도 그냥 노랗고 붉은 것이 아니다. 여린 노란색, 짙은 노란색, 어린 아이 똥 색깔의 노란 색, 짙붉은 색, 연한 붉은 색, 너무 붉어 검붉기까지 한 색…. 그 다양한 색깔들이 어울려 이루어내는 가을의 빛은 햇살 속에서 더 투명하다.

a 다람쥐, 겨울 채비로 바쁘다.

다람쥐, 겨울 채비로 바쁘다. ⓒ 최성수

돌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겨울 준비를 하다 가려웠는지, 제 발로 등을 긁고 있다. 내가 다가가도 도망 칠 생각도 않는다. 아직 어린 다람쥐라서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숲 속에 든 나를 자신의 친구쯤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녀석은 그 까만 눈으로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기까지 한다.

a 노박덩굴의 붉고 노란 빛 속에 가을이 숨어 있을까?

노박덩굴의 붉고 노란 빛 속에 가을이 숨어 있을까? ⓒ 최성수

가을 숲 속에서는 누구나 인간이 아니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길 가 키 작은 나무를 휘감고 올라간 노박덩굴이 바알간 열매를 매달고 있다. 나도 누군가의 등에 매달려 이 나이까지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숲길은 끝이 없을 것처럼 이어져 있다. 때로 발목을 휘감는 마른 풀들과, 내려다보는 숲 속에 자작자작 내려앉는 가을 햇살과 동무하며 걷는 숲길은 느긋하다. 인간을 피해 숲 속에 살던 새들이 인간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달아난다. 가을 숲에서는 작은 발걸음조차 크게 울린다.

a 고려엉겅퀴. 우리 마을에서는 곤드레라고 부른다. 곤드레 밥 생각이 난다.

고려엉겅퀴. 우리 마을에서는 곤드레라고 부른다. 곤드레 밥 생각이 난다. ⓒ 최성수

봄과 여름이 채우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비우는 계절이리라. 겨울이라는 먼 길을 가기 위해 무거운 제 몸의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하는 계절. 그래서 나무들은 나뭇잎을 다 떨어뜨리고 바람 맞을 채비를 하리라. 가을 숲에서 발걸음이 더 크게 울리는 것은 어쩌면 내 마음도 가을의 나무나 짐승들처럼 내 몸 안을 텅 비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a 장구채, 키 늘이고 가을 바람을 맞는다.

장구채, 키 늘이고 가을 바람을 맞는다. ⓒ 최성수

두 시간 넘게 산을 휘돌았다. 어스름 길을 걸어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다. 달빛도 없이 캄캄한데, 내가 찾아가야 할 길만이 어둠 속에 희끄무레하게 누워 있다.

돌아보면 어디가 가야 할 길인지 알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마치 가을 숲길을 헤매듯. 그러니 앞으로 가야 할 길조차 아득할 뿐이다. 그래도 이 가을, 마음이 그리 조급하지 않은 것은, 이제 내가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고, 앞으로 갈 길이 조금은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늘 하루 내가 걸어 다닌 숲길이 곱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a 투구꽃. 겨울을 향해 길 떠나는 사람의 넋일까?

투구꽃. 겨울을 향해 길 떠나는 사람의 넋일까? ⓒ 최성수

아, 가을은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침잠하는 계절인가 보다.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숲길,
이슬에 젖은 거미줄이 발목을 묶는다.
붉나무가 제 몸 밖으로 밀어내는 저 투명한 빛
후두둑 빗줄기처럼 산비둘기 한 마리
풀섶에서 날아오른다, 마음 툭툭 내려앉는다.
너무 깊이 들어온 것은 아닐까?
돌아보면 내가 헤치고 온 길에는 휘어진 풀대궁도 없다.
물푸레나무가 기우뜸하게 서 있다.
물푸레, 물에 담그면 푸른 물이 든다는
그 나무 밑동에는 물 한 종지 없다.
그래도 물푸레나무는 제 몸의 물을 말리지 않는다.
황벽나무를 감고 늘어진 다래 덩굴이 어깨를 두드린다.
사 층까지 올린 층층나무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는다.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닐까?
나는 가는 눈 뜨고 숲 사이로 내려앉는 아침의 기운을 바라본다.
골 깊은 곳에서 안개가 웅얼거린다.
마른풀과 듬성듬성한 나무들이 끄덕인다.
이 숲, 떡바우골은 어린 날 발구를 끌고 눈길을 헤쳐 왔던 곳이다.
그 기억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린 이 가을
가지 않아야 할 길로 깊이 들어와 버린 헛헛함
노을도 없이 스러져버린 봄빛과
땀방울조차 흘려보지 못한 한여름은
어디로 가버리고 만 것인지?
총총총 마음을 닫고 사라지는 콩새의 뒷꼭지에 남은
마흔 후반의 이 막막함
돌아갈 길조차 찾지 못할 나이가 되어버린
이 숲길의 끝은 어디인가?
이슬에 젖은 거미줄이 발목을 묶는
시월의 내리막길에서 바라보는 숲에는 온통
눈부신 어지러움으로 가득하다.

- 졸시 <시월>


a 늦게 피어 더 고운 가을의 제비꽃

늦게 피어 더 고운 가을의 제비꽃 ⓒ 최성수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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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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