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보다 더 재미 있는 배낭 여행 안내 책

입담이 구수한 유럽 여행기 <노 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등록 2006.10.25 10:09수정 2006.10.25 13:53
0
원고료로 응원
a 책 <노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책 <노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 부키

6년 전 유럽에 머무르면서 나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유럽 배낭 여행에 열광할까 의아했다. 사람 사는 게 다들 비슷비슷할 텐데 굳이 많은 이들이 '유럽'을 찾는 이유는 뭘까?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한국에 돌아와서야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풍광과 건물, 이국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저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야말로 많은 이들에게 여행을 떠나도록 하는 동력이 아니던가.

책 <노 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은 20대 후반에 늦은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난 한 여인네의 이야기다. 인생의 방황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던 2002년 무턱대고 처음으로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여행 칼럼니스트 정숙영. 아무 생각 없이 떠난 여행은 그녀의 삶을 180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에서 삽질하다, 난데없이 바람나다' 등 소제목부터 범상치 않은 이 책의 시작은 병원 의사인 한 언니가 뮌헨으로 떠난다는 말에 저자가 부화뇌동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언니의 말에 대뜸 자기도 8월에 유럽 배낭 여행을 떠날 건데 언니한테 한번 들르겠다는 엉뚱한 소리를 던지는 정박사(그녀의 필명이자 별명이라고 한다).

그 동기는 그저 독일에 가면 맛있는 맥주를 배 터지게 마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시작한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동기 덕분에 백수인 그녀가 돈도 없으면서 여행을 떠난다. 비록 계기는 빈약했으나 철저히 준비하면서 분홍 파일 하나를 계획서로 만들고 비행기에 훌쩍 오른 그녀.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파일을 통째로 잃어버리며 그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결국 '노 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이 되어 버린 그녀의 배낭 여행은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이상한 성추행범을 만나지 않나, 기차에서 곯아떨어지는 바람에 베고 있던 손가방이 찢겨 나가는 것조차 모르지 않나, 하여간 배낭 여행에서 겪을 수 있는 온갖 에피소드는 다 겪은 셈이다.

그래도 그녀, 참으로 낙천적이고 착하며 감수성 풍부하다. 고생을 이렇게 한 보따리씩 안고 다니면서도 희희낙락 즐겁게 여행을 즐긴다. 볼 것 하나 없는 밀라노에서 우연히 만난 김군을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에 여행지를 수정하기도 하고, 운명처럼 그를 다시 만나 더욱 재미난 여행을 펼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워낙 계획 없이 여기저기서 얻은 정보를 중심으로 이동하다 보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돈도 의외의 지출이 많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하기만 하다. 계획 없이 이동하더라도 언제나 눈 앞에는 볼거리가 있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으며 그녀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여러 촉진제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녀가 꼽은 멋진 장면 중 카프리의 푸른 동굴에 대한 묘사는 책을 읽는 이의 마음마저 들뜨게 만든다.


"배는 쑤욱 미끄러지듯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안은 제법 넓었다. 몸을 일으켜 동굴을 둘러보았다. 깜깜했다. 이게 무슨 푸른 동굴이냐 검은 동굴이지. 살짝 열 받으려고 했다. 돈 처들이고 뱃멀미까지 했는데 검은 동굴이라니… 뭘 죽기 전에 보라는 거야?

투덜거리는 동안 배는 넓지 않은 동굴 끝까지 들어가 있었다. 사공 아저씨는 천천히 뱃머리를 입구 쪽으로 돌렸다. 그때였다. 입구 쪽에서 쨍한 햇빛이 들어와 동굴 안 물속으로 퍼져…물 속으로 녹아… 물속으로…물속으로… 동굴 안에 담긴 바닷물은, 형언할 수 없는 푸른빛으로 물들어 춤을 추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장면을 만날 수 있었으니 그녀의 여행이야말로 행운 가득한 멋진 여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늘 행운만 따를 수는 없는 법. 배낭 여행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열차 여행이 피곤과 힘든 일정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정박사는 제멋대로 여행 스케줄을 조정하여 돌아다니는 운명이 아니던가.

이러다 보니 원래 약속했던 뮌헨의 의사 언니는 하루 종일 역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안고 숙소로 돌아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가기로 한 날짜에 도착하지도 않고 엉뚱한 날 그녀를 찾아가게 된 저자는 미안한 마음만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뮌헨의 맛있는 맥주와 분위기에 취해 두 여성들은 마음껏 독일의 낭만을 즐긴다.

이 책의 1부는 정박사가 처음으로 떠난 배낭 여행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럼 2부는 어떤 내용일까? 여행 신이 내리게 된 정박사는 무작정 떠났던 첫 배낭 여행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결국 한국에서 여행 가이드 일을 시작한다. 여행이 바로 그녀의 숙명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나라 내에서 하는 가이드 일이지만 나름대로 재미있게 지내다가 다시 기회를 만나 유럽으로 떠나는 그녀. 2부는 1년 만에 다시 찾은 유럽 이야기다. 책의 1부가 철부지 아이 같은 정박사의 유럽에서 벌이는 온갖 엉뚱한 에피소드라면 2부는 좀더 정돈된 유럽 여행기다.

그래서 1부는 재미와 재치만점의 이야기들이고 2부는 보다 구체적인 여행기라고 보면 된다. 2부의 내용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스위스에서 캠핑을 하며 자연과 가까이서 보낸 며칠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스위스의 푸른 초원에 누워 흰 눈이 덮인 산들을 바라보며 그녀는 많은 것을 가슴에 품고 왔으리라.

'유럽'이라는 나라를 시작으로 하여 본격적인 여행가가 된 그녀. 그녀가 앞으로 펼칠 여행 이야기가 궁금하다. 현재 저자는 여러 인터넷 사이트와 책을 통해 여행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구석구석, 외국의 조그만 마을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고 재미있게 전하는 멋진 여행기를 기대해 본다.

노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 읽고만 있어도 좋은

정숙영 지음,
부키, 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영상] 가을에 갑자기 피어난 벚꽃... 대체 무슨 일? [영상] 가을에 갑자기 피어난 벚꽃... 대체 무슨 일?
  5. 5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