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8회

등록 2006.10.26 08:24수정 2006.10.26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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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권 가경(佳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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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중보의 다음날 새벽은 비명소리로 시작되었다. 그것도 운중보 내에 심상치 않은 평지풍파를 몰고 온 철담(鐵錟) 하후진(夏候振)의 거처인 매송헌(梅松軒) 근처에서 시녀가 지른 비명소리였다. 그 비명은 또 다른 시녀의 비명을 불러오고, 급기야 그 비명을 듣고 뛰어간 네 명의 시비가 동시에 지른 비명으로 운중보 전체가 깨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운중보의 야간 경비 책임을 맡고 있던 호조수(虎爪手) 곽정흠(郭晸歆)은 나이가 사십대 후반의 몸집이 왜소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비쩍 마른 체형이어서 건장한 사내의 한 주먹이면 뼈가 으스러져 버릴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맞지 않았고, 뼈가 부러져 본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남과 다투기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싸움을 피해서도 아니었다. 그가 그래도 이름이 있다는 상대와 싸운 횟수만 해도 어림잡아 백여 회가 넘었다.

그럼에도 그는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를 때릴 사람이 없었다. 무림인이라면 으레 몸 한두 군데 정도는 있어야 할 상처 흔적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몸이 빨랐다. 빠른 정도가 아니라 너무 빨랐다. 사람이 어찌 휘두르는 검날이나 쏘아오는 화살보다 빠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은 그저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그는 내내 빠른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빨랐다. 그것은 정확한 눈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상황을 보는 정확한 눈과 순간적인 판단력 덕택으로 그는 맞지 않았고, 칠년 전 운중보에 들어온 그때부터 그는 꽤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던 것이다.


막중하다고는 하나 운중보의 야간경비는 사실 외부사람이 알면 놀랄 정도로 허술했다. 야간경비무사라 해야 겨우 열댓 명 정도. 그 인원으로 경비를 서려면 사오십장에 한 명이나 제대로 서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보주의 회갑연을 맞아 외부 손님들이 많아지면서 인원을 두 배로 늘리기는 했지만 왕래를 제한하거나 금지구역을 정한 바 없어 어느 문파나 궁궐 같은 곳보다도 훨씬 자유로웠다.


운중보가 지형적으로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다는 점이 그 이유였지만, 사실 지금까지 운중보에 외부로부터 누군가가 침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었다. 굳이 필요하다면 운중보에 드나드는 인원의 파악과 운중보에 있는 누군가가 병이 났다든지 하는 경우에 조치를 하는 것 등이어서 다른 문파 등에서 보는 삼엄한 경비와는 거리가 있었다.

더구나 운중보 내에서 야간에 특별한 사고가 일어난 일은 거의 없었다. 공식적인 비무 외의 사적인 비무는 금지하고 있었고, 시비가 일어난다 해도 무력을 사용하는 것 역시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다보니 지금까지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사고는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것도 문하생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닌 외부 손님들 간의 사고가 대부분이었고, 그 역시 운중보의 내부 규율에 따라 처리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아예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하튼 문제는 별도의 경비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있었다. 호위나 경비 무사라고 해봐야 겨우 삼십 명 남짓. 교대할 인원도 부족한 형편이었다. 사실 귀빈이 운중보를 방문하거나 하는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는 문하생이나 교두(敎頭)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은 있었다. 하지만 예우차원에서 그런 것이지 실질적인 호위나 경비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은 좀 달랐다. 그렇지 않아도 철담어른이 시해당한 이후로 좌총관에게 경비를 늘려야 한다는 의견을 수차에 걸쳐 건의한 바 있었다. 무림 거물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상황에서 형식적인 경비도 세우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당연한 요구였다.

하지만 문하생이나 교두들 역시 안면이 있는 귀빈들을 찾아다니느라 요사이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 당장 문하생들을 차출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하튼 호조수 곽정흠은 야간경비에 있어 가장 피곤한 시각인 새벽에 비몽사몽을 헤매다가 수하의 보고를 받고 며칠 전 유명을 달리한 철담 하후진의 거처인 매송헌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매송헌 주위에는 좌우로 한 개씩의 전각과 뒤쪽에 두 개의 소각이 호위하듯 붙어 있었는데, 좌우에 있는 전각에는 운중보주가 머무는 운중각이나 매송헌에서 시중드는 시비나 아랫사람들이 머무는 곳이었고, 뒤쪽에 있는 소각은 철담의 제자 백도 자인과 쇄금도 윤석진이 머무는 곳이었다.

매송헌 우측에 있는 전각에 들어서자마자 곽정흠의 정확한 눈과 순간적인 판단력은 순식간에 마비되어 버렸다. 그는 너무나 황당하고 아주 보기 드문 광경에 입을 쩍 벌리고 한동안 멍청하게 서 있어야 했다.

실내로 들어서자 이미 열린 방문으로 보이는 방안의 풍경은 너무 적나라했다. 살아있었다면 정말 보기 드물 정도의 완벽한 몸매를 가진 남녀 한 쌍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침상 위에 포개져 있었던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그들이 죽는 순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죽은 한 쌍의 남녀(男女)는 우연하게도 철담 하후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사내는 뜻밖에도 철담 하후진의 제자 중 한 명인 쇄금도(鎖擒刀) 윤석진(尹晳振)이었다. 어제 오후만 해도 백도와 함께 귀산노인을 찾아가 흉수가 누군지를 물었던 인물이 여인과 방사를 벌리다 죽어있는 것이다.

사부의 시신을 최초로 발견한 불운한 사내였고, 그 불운은 자신에게까지 미친 것일까? 최근 들어 호사가들의 입에 부쩍 오르내리며 쇄금도라 불린 기형도는 침상에서 몇 발자국 정도 떨어진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하기야 자신의 병기를 쥐고 여자와 교접할 사내는 없을 것이다. 그의 몸은 한 여인의 몸에 실려 있었고, 두 남녀의 몸은 은밀한 모양으로 밀착된 채 포개져 있었다. 굳이 보는 시선을 달리하지 않는다 해도 남녀의 하체는 한 몸이 되어 있을 터였다.

사내의 밑에 있는 여자는 몸이 풍만하고 살결이 유난히 뽀얀 여자였다. 이십대 후반으로 짐작되었지만 둥근 얼굴에 후덕한 인상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녀를 본 곽정흠은 눈살을 찌푸렸다. 진가려(秦佳麗)라는 이름을 가진 이미 알고 있는 여자였다.

아주 어려서 운중보에 시비로 들어왔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여자였다. 부지런하여 틈틈이 글을 익히고 스스로 예절도 갖추었다고 하는데, 그러다 보니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시비들을 관리하는 지위를 가지게 된 터.

특히 그녀는 보주가 머무는 운중각과 그 주위의 사신각, 그리고 철담 하후진이 머무는 매송헌에 있는 시비들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자신의 거처에 사내를 끌어들여 운우지락을 나누던 그 자세로 죽은 것이다.

한 때 철담 어른의 눈에 들어 시비를 관리하는 위치에 오른 그녀는 몇 년 전 같이 죽어 있는 쇄금도 윤석진과 잠시 염문 아닌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몸가짐이 매우 단정하다고 소문난 여자였다. 하지만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 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거처에 사내를, 더구나 아무리 과거에 눈이 맞은 적이 있다 해도 이제는 아내까지 있는 윤석진을 끌어들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사인은 아주 분명했다. 두 남녀의 생명을 앗아 간 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그 검은 아마 침상 밑에서 솟구쳐 올라 두 남녀의 몸을 관통한 것 같았다. 검은 손바닥 정도 길이만큼 사내의 허리와 등 중간에 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상황은 너무나 확연했다. 두 사람이 교접을 하고 있는 사이에 흉수가 침상 밑에서 검을 일직선으로 찔러 올려 침상바닥을 뚫고는 두 사람의 몸을 꼬치 꿰듯이 꿰어버린 것이다. 두 사람은 운우지락의 황홀한 순간에 영문도 모르는 채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리 젊은 것들이라지만 짐승과 다를 바 없군…. 쯧….'

죽어있는 쇄금도 윤석진은 철담의 진전을 이었다고 했으니 어찌 보면 자신보다 더 고수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행동은 철부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부가 죽은 이 마당에, 아직 흉수를 밝혀내지 못해 장례도 치르지 않은 상황에서 계집을 끼고 뒹굴다 죽어 자빠져 있다니….

계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비 출신으로 면천을 하고 제법 시비를 부리는 위치에 올랐으면 족함을 알고 매사에 조심스레 처신해야 할 것임에도 자신의 처소에 사내를 끌어들인 것은 철없는 짓이었다. 설사 과거 서로 정을 통했던 사이라 하더라도, 사내가 오랜만에 돌아와 아무리 막무가내 요구를 하더라도 최소한 한 때 시중을 들었던 철담 어른의 시신은 안치한 후에야 그 짓을 해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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