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북한대사관의 박명국 공사가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윤여문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하겠다고 발표한 지난 4일, 호주국영 ABC라디오를 청취하는 도중에 호주에서는 좀처럼 듣기 힘든 호주주재 북한외교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호주의 행정수도인 캔버라에 소재하는 북한대사관의 박명국 공사가 ABC라디오와 전화인터뷰를 가진 것.
그는 핵실험 단행 결정의 배경을 묻는 방송진행자의 질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미국이 군사·경제적으로 한반도 주변에 전쟁을 선포한 상태였다"면서 "지금의 상황은 전쟁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국면"이라고 답변했다.
그의 답변이 북한 외무성의 성명에 비해서 한결 강도가 높게 느껴졌다. 문득 유창한 영어로, 비교적 소신이 담긴 발언을 하는 박명국 공사가 궁금해졌다. 즉각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몇 차례 거절을 당한 후, 우여곡절 끝에 단독 인터뷰가 성사됐다.
북한 핵실험과 관련한 북한 외교관의 첫 단독인터뷰. 인터뷰의 성과 여부를 차치하고라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10월 21일 이른 아침에 시드니를 출발해서 캔버라로 향했다.
"윤 선생, 무섭지 않습네까?"
정오쯤에 도착한 호주의 행정수도 캔버라는 주말의 한가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북한 핵실험으로 열흘 남짓 '난리통'인 지구북반구의 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평화로움이었다.
시간조차 느리게 흐르는 듯한 도시를 빠르게 관통해서 연방국회의사당 뒷길을 달리다보니 자그마한 언덕배기 위쪽으로 눈에 익은 인공기(북한국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재스민이 하얗게 피어있는 2층 건물의 입구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사관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려는 순간 문이 열렸고 박명국 공사 부부가 반갑게 기자일행을 맞아주었다.
박명국 공사는 북한 외무성에서 핵 회담통으로 통하는 외교관으로, 3자회담과 6자회담의 북한대표였고 외무성 미국과장을 역임했다.
호주국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꽂혀있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는 응접실은 소파 한 세트와 8인용 식탁만 덜렁 놓여있어서 실제보다 더 널찍하게 느껴졌다.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소파에 앉자마자 박명국 공사가 "윤 선생, 여기 오니까 무섭지 않습네까?"라고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마땅한 답변이 떠오르지 않아서 머뭇거리는 동안 박 공사 부인이 "무슨 차를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커피를 주문했다.
북한과 호주 날씨를 비교하면서 커피를 다 마신 순간, 박 공사가 손수 빈 찻잔을 들고 부인과 함께 부엌으로 갔다. 손의 물기를 제거하면서 응접실로 돌아오는 박 공사에게 미적거렸던 답변을 건넸다.
"처음엔 무서울 뻔 했는데 박 공사가 찻잔 들고 다니는 걸 보니 하나도 무섭지 않습네다."
"같은 민족끼리 터놓고 얘기해보자"
"북한 핵실험 후에 부시 미국 대통령이 자다가도 웃는다는 우스개를 들었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맹비난하더니, 정작 이라크 전쟁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던 부시를 건져준 건 북한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인터뷰 아닌 난상토론이 시작됐다.
"글쎄올시다, 부시가 한 10분 동안 웃을지 모르지만 나머지 23시간 50분은 울고 있을 겁네다"라는 즉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번 핵실험을 통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는가? 중간 손익계산이라도 해보았는가?"라는 질문에도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갖고 어찌 손익계산 운운하는가? 이건 20원 투자해서 30원 만드는 것과 다른 차원의 과업이다"라고 정색을 하면서 답변했다.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핵실험으로 힘겹게 얻어낸 6.15 남북공동선언을 훼손한 건 엄연한 사실 아닌가?"라는 조금 아픈 질문을 던졌더니, 박명국 공사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6.15선언의 정신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제3국(미국)이 조선반도를 상대로 핵위협을 하는 마당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또한 거기엔 조선반도의 전쟁억지력 강화를 위한 전략적인 문제와 전술적인 문제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답변이 조금 미흡했다고 판단했는지 박명국 공사는 다음과 같은 원론적인 내용을 덧붙였다. "조선반도에서의 대결구도는 '조선민족 대 미국'이라고 규정하고, 민족공조로 미국과 맞서 싸워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반기문 장관이 사무총장 된 것 좋게 생각"
같은 민족끼리 이역만리 호주에서 만났으니 터놓고 얘기해보자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조금은 각이 선 대화가 오고간 다음, 차 한 잔을 다시 마시면서 화제를 주변강대국과 UN 쪽으로 바꿨다.
조금은 민감한 사안인 중국에 관해서 박명국 공사는 말을 아꼈지만 일본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직격탄을 날렸다.
"고이즈미 일본 수상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우리가 얼마나 큰 성의를 보였는가는 국제사회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베 관방장관이 기존의 모든 북일 합의사항을 다 뒤집어엎었다. 그는 조선 문제(대북강경책)로 수상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니 뭘 기대하겠는가?"
그는 이어서 "UN도 기대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다, UN은 공정성을 잃었다, 그러나 같은 민족으로서 반기문 장관이 사무총장이 된 것을 좋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UN사무총장의 직분에 맞게 국제문제를 공정하게 다루기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