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냉이 한 바구니에 행복을 담다

등록 2006.10.29 19:44수정 2006.10.30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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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올 농사가 잘 되었다며 배추며 무를 다듬어 차에 실어주시던 아버지가 뒤란으로 가서 호미를 들고 나오십니다.


"밭에 가서 나생이(냉이) 캐다 줄게."
"가을에도 냉이를 먹어요?"
"가을철 나생이가 향이 더 좋다."

아버지 말을 듣고 아내가 반색을 합니다. 냉이 캐가지고 가면 저녁 찬거리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냉이 다듬어 된장 풀고 구수하게 국 끓이면 김치 하나만 놓고도 밥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좋아합니다. 아내 말대로 아이들도 나도 된장 풀어 푹 끓인 냉이국을 무척 좋아합니다.

"호미 주세요. 저희가 캐올게요."
"그럴래?"
"자기, 같이 가자."

냉큼 호미를 받아든 아내가 팔을 잡아끕니다. 아내에게 끌려 밭을 향하는데 어머니가 바구니 가지고 가라고 손짓하십니다. 바구니 안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있습니다. 냉이 캐서 밭에서 말끔히 다듬어 봉지에 넣어 와야 가지고 가기 편하다며 넣어주신 겁니다.

길 건너 밭에 도착하니 아버지 말씀대로 배추며 무가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밭두렁을 따라 냉이도 다닥다닥 자라고 있습니다. 긴 가뭄 이기라고 배추밭에 주는 물 나누어 마시고 자란 덕분에 다른 곳의 냉이에 비해 눈에 띄게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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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이야, 냉이 참 크다."

신이 난 아내는 호미로 냉이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냉이 캐는 재미에 푹 빠져 콧노래마저 흥얼대던 아내가 어느 순간 '엄마야' 비명을 지르며 내게 뛰어옵니다.


"왜 그래?"
"발밑에서 뭐가 움직였어."
"아무 것도 없는데."
"이상하다."
"메뚜기가 뛰었겠지."
"그런가?"

눈이 남달리 큰 아내는 겁이 참 많습니다. 감자 캐다 지렁이라도 발견하면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지난 추석 때 시골집 마당을 가로질러 기어가는 뱀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밤에 자다 식은땀 흘리며 잠꼬대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담에 농촌에 살 수 있겠어?"

부모님 돌아가시면 시골 내려와 살자는 게 우리 부부의 막연한 노후 설계입니다. 혼자 사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함께 사는 거니까 괜찮다고 아내가 배시시 웃습니다. 겁이 많을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나보다 더 강단진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게 아내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아내도 나도 어린 시절 시골뜨기로 자란 탓에 시골 공기 숨쉬며 있을 때면 마음이 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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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아내가 다시 냉이를 캐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마주앉아 냉이를 캤습니다. 바구니에는 냉이가 소복하게 차올랐습니다. 냉이를 캐다 문득 바라본 아내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습니다. 바구니에 냉이와 함께 행복이 차오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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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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