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규 국정원장(자료사진)오마이뉴스 이종호
김승규 원장이 적시한 원장의 자질은 세 가지이다. '개혁 의지와 국제적 안목을 갖추고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 그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반론이다. 특히 내년 대통령 선거가 있는 만큼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은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인사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들이 되면 절대 안 된다"고 못박고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정권과) 코드를 맞출 우려가 있다"면서 "국정원 내부(인사)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해 특정인에 대한 '비토'를 표명한 것이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장로)인 김승규 원장이 일요일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교회 앞에서 만난 기자와 나눈 '스탠딩 미팅'이라고는 하지만, 문제는 수사 중인 사건을 두고 "간첩단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단정하는 등 국정원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금기의 '선'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김승규 원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것은 26일이다. 그리고 사의 표명 소식이 알려진 27일부터 후보군이 언론 하마평에 올랐다. 언론 매체에 따라 후보군의 범위에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권진호 전 국가안보보좌관, 김만복 국정원 1차장, 윤광웅 국방장관, 이종백 서울고검장으로 윤곽이 좁혀졌다.
이처럼 언론 하마평이 오르내린 가운데 '청와대 핵심 관계자'로 통하는 모 인사는 일요일인 29일 2∼3배수로 압축된 통일·외교·국방장관과 국정원장 등 외교안보 라인 후보군을 언론에 공개했다.
이날 국정원장 후보군은 김만복 국정원 1차장, 윤광웅 국방장관, 이종백 서울고검장의 3배수로 범위가 좁혀졌다. 그러나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그에 앞서 '회전문 인사'는 없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물러나는 윤광웅 국방장관이 다시 국정원장으로 기용될 가능성을 배제한 발언이었다. 그렇다면 윤광웅은 '허수'이고 사실상 김만복·이종백의 2배수 경쟁이었다.
김승규 원장, 청와대의 2배수 후보인 이종백 고검장-김만복 1차장 모두 '비토'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승규 원장은 29일 코드인사와 내부인사 발탁은 안 된다고 '비토'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코드인사는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에 도움이 되지 않고', 내부인사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사유까지 밝혔다. 특히 그는 "일부 인사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들이 되면 절대 안 된다"고까지 못을 박았다.
당연히 '코드인사'와 내부발탁 인사는 각각 이종백 고검장과 김만복 1차장을 겨냥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고검장은 노 대통령과 사법시험 17회 동기다. 정상명 검찰총장과 안대희 대법관, 김종대·조대현 헌법재판관과 서상홍 헌재 사무처장 그리고 전효숙 헌재 소장(지명자) 등이 노 대통령이 임명한 동기생들이다. 이 고검장은 17회 동기 가운데서도 노 대통령과 특히 가까웠다는 이른바 8인회 멤버이기도 하다.
김만복 차장은 이종석 통일부장관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정원 내부에선 후임 국정원장을 겨냥해 김만복 1차장(해외담당)과 이상업 2차장(국내담당)이 움직여 왔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김만복 차장이 발탁될 경우, 국가안전기획부와 중앙정보부 시절을 비롯한 국정원 40여년의 역사상 첫 내부 출신 원장이 된다(이종찬 초대 국정원장도 국정원 출신이지만 그는 정치권에 몸담았다가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청와대가 국정원장 후보군을 3배수(실제로는 2배수)로 좁힌 이날, 평소 신중하고 치밀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김승규 원장이 그 둘은 '절대 안 된다'고 고춧가루를 뿌린 셈이다.
김승규 원장의 '충격적인' 인터뷰 내용이 보도된 30일 오전 국정원은 두 건의 보도자료를 내고 해명했다. 한 건은 이날 간부회의에서 국정원장의 수사 관련 언급 내용을 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 건 역시 '국정원 수사사건에 대한 협조를 당부'하는 것이었다.
국정원에 따르면, 김 원장은 이날 오전 10시 30분 회의에서 최근 국정원 수사에 대한 외부 압력설 보도와 관련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사의 배경에 대해서도 김 원장은 "일부 언론에서 이를 달리 추측하거나 확대 해석하고 있어 안타깝다"면서 "사의를 표명한 것은 외교안보 진영을 새롭게 구축하려는 대통령께 부담을 드리지 않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외부압력설'은 부인하면서 후임 국정원장 인선 부분은 해명 안해
그러나 후임 국정원장 인사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해명이나 언급도 하지 않았다. 코드인사와 내부인사 발탁에 대한 비토가 '소신'임을 드러낸 것이다.
주목할 것은 같은 보도자료의 맨 끝에 "한편, 국정원은 일부 언론에서 국정원장의 사퇴와 관련해 보도한 '대북 포용론자와 갈등 폭발', '핵 실험후 청(靑)-통일부와 충돌' 등 보도 내용은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고 적시한 대목이다.
이른바 '간첩단 사건' 수사에 대한 외부 압력설은 김 원장의 발언을 빌려 전면 부인하면서도, 일부 언론에서 제기한 대북포용론자와 갈등 폭발, 핵 실험후 청(靑)-통일부와 충돌 등에 대해서는 국정원장의 멘트가 아니라 국정원의 입장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와 관련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평소 자신과 관련된 대외 발표문의 문구를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는 김 원장의 스타일로 보건대 김 원장이 자신의 멘트로 나갈 것과 원(院)의 입장을 분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김 원장은 "일부 인사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들이 되면 절대 안 된다"면서 "국정원 내부(인사)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특정인에 대한 '절대적 비토'를 표명한 것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 것이다.
노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일보> 기자에게 '코드인사' 거론
공교롭게도 김 원장은 호남(전남 순천) 출신인데 청와대 인사추천 3배수에 든 원장 후보군은 모두 부산-경남 출신이다. 김만복 1차장과 이종백 고검장은 부산고 출신이고, 윤광웅 국방장관은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1년 선배이다.
그래서 김 원장이 "일부 인사들이 열심히 뛰고 있는데 이들이 되면 절대 안 된다"고 비토한 배경에는 국정원의 고질인 영호남 인맥 갈등이 도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 원장이 퇴진하면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한 사람들의 피해의식과 김 원장의 독특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함께 어우려져 그의 '작심 인터뷰'를 낳았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그러나 국가정보기관장이라는 자리는 재임 중 언론 인터뷰를 안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군사독재정권에서건 문민정권에서건 전임자들도 대부분 다 이 불문율을 지켰다.
그런데 김 원장은 노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조선일보> 기자와, 그것도 노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용어 중의 하나인 '코드인사'를 거론하며 가장 민감한 대통령의 인사권을 침해하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그런 '불문율'을 깬 그의 '작심'을 이끌어낸 것은 세무조사로 '독'이 오른 <조선일보> 기자들이었다.
국정원 45년사에 이런 일은 처음이다. 국정원에 '망조'가 들었거나 참여정부에 '망조'가 들었거나, 그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이든 후자이든 분명한 것은 이 정부의 '자업자득'이라는 점이다.
대통령 직속기관의 수장으로서 대통령의 '레임덕' 방지에 앞장서야 할 국정원장이, 그렇지 않아도 '안보 IMF 위기론'에 시달리는 참여정부에 '결정타'를 먹인 현재의 상황에 잘 어울리는 표어는 '흔들리는 국정원, 무너지는 참여정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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