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묻는 아이에게 전나무를 보여주다

세 번째 찾은 강원도 양양 미천골의 가을

등록 2006.11.02 14:39수정 2006.11.02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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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단풍 든 숲과 조화를 이루는 미천골 계곡

단풍 든 숲과 조화를 이루는 미천골 계곡 ⓒ 김선호

a 이런 길, 오래 오래 걷고 싶었죠.

이런 길, 오래 오래 걷고 싶었죠. ⓒ 김선호

벌써 세 번째 발걸음입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첫째랑 아직 유치원생이었던 둘째를 데리고 처음 미천골을 찾았을 때가 2001년. 어느덧 두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과 4학년이 되었습니다.

강원도 양양 미천골의 늦가을은 노란 단풍으로 물결치고 있습니다. 가을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기도 합니다. 미천골의 가을햇살 아래 서 있는 두 아이를 보며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를 생각합니다. 미천골의 가을을 통해 세월의 간격을 가늠해 보는 것입니다. 조금은 애틋하고 뿌듯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미천골에 서서 두 아이를 바라보면 미안한 것들이 많이 떠오릅니다. 더 사랑해야겠단 생각도 듭니다.


'얼마나 계곡이 아름다우면 미천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처음, 미천골이라는 이름을 접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골짜기'로 들렸던 미천골은 그러나 '아름답다'는 뜻이 아닌 '쌀뜨물'이 흐르던 계곡을 뜻한다 해서 조금 실망스러웠지요.

미천골 입구 쪽에 오래된 폐사지 하나 있습니다. 한때는 대가람이었다는데, 지금은 석등과 부도 그리고, 석탑만 외롭게 남은 선림원지가 그곳입니다. 그 큰절에서 밥을 하느라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흘러들어 계곡이 하얗게 변할 정도였답니다. 그리하여 미천골(米川谷)이 되었다네요.

말씀드렸다 시피, 선림원은 이제 폐사지로 외롭게 서있을 뿐이므로 쌀뜨물이 다시 흘러들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나는 감히 미천골을 '아름다운 골짜기' 미천골(美川谷)로 부르고 싶습니다. 미천골에 있어 '아름다운 골짜기'는 지극히 타당해 보입니다. 특히 가을의 미천골은 더욱 그렇습니다.

미천골(米川谷)을 미천골(美川谷)로 부르고 싶습니다

a 풍요로운 햇살, 그리고 노란빛의 단풍이 눈부신 미천골

풍요로운 햇살, 그리고 노란빛의 단풍이 눈부신 미천골 ⓒ 김선호

a 숲속의 정자 '미천골정'

숲속의 정자 '미천골정' ⓒ 김선호

10월의 마지막주 일요일의 미천골은 늦가을로 가고 있습니다. 더러는 낙엽으로 지고 남은 잎들은 단풍이 들어 미천골은 눈부신 가을빛 세상입니다. 미천골은 유독 노란 단풍이 많습니다.


지상과 천상에서 고루 비춰든 햇살이 나뭇잎 하나 하나에 배어들어 미천골은 황금빛 세상입니다. '그래, 더 많이 걷자'고 일찌감치 차에서 내려 산길을 걷습니다. 차량이 통제되는 구간에서 불바라기 약수터까지 약 5km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3km 정도 더 앞에서 걷기로 합니다. 그렇게 되면 왕복 16km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아이들과 걷기에 만만한 거리가 아니지만, 임도를 따라가는 미천골 가는 길은 시간만 허락한다면 더 많이 걷고 싶은 길입니다. 다행히 두 아이도 걷는데 이제는 이골이 났습니다.


세 번째 걷는 길이고 보니 눈에 익숙한 것들에 반가운 마음도 있습니다. 계곡 가에 서 있던 단풍이 유난히 붉던 단풍나무 한 그루, 눈물을 흘리듯 낙숫물을 똑똑 흘려보내는 암벽을 만나면 와락 반가운 마음에 그 앞에 서 보는 것입니다.

나무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산모퉁이를 돌면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서 있던 나무 한 그루는 유난히 노란 단풍이 예뻐서 기억합니다. 올해도 역시 햇살만큼 눈부신 황금빛으로 물들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면 물결치듯 넘어가는 산능선과 미천골을 가득 물들이는 단풍나무와 저 아래 계곡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며칠 전에 느닷없이 강원도 지역을 강타한 가을 홍수에 미천골 계곡 물이 상당히 불어나 있습니다. 가을이면 낙엽이 지듯 계곡도 되도록 물을 다 비워내야 겨울을 날 수 있습니다. 갑자기 불어난 계곡 물을 부지런히 아래로 흘러 보내느라 미천골 계곡은 숨차 보입니다. 종내는 이 골짜기를 떠나 바다로 흘러들 물길을 찬찬히 훑어보며 우리는 물길을 거슬러 위로 걷습니다.

5년에 걸쳐 세 번의 걸음... 휴양림 시설들이 많이 들어선 미천골

a 차 한잔 나누며 여기서 잠시 쉬어가요.

차 한잔 나누며 여기서 잠시 쉬어가요. ⓒ 김선호

a 오를 수록 계곡은 아래로 멀어지고 숲은 깊어집니다.

오를 수록 계곡은 아래로 멀어지고 숲은 깊어집니다. ⓒ 김선호

세찬 물길 소리는 오래 따라옵니다. 숨겨져 있던 실폭포들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골이 깊은 미천골은 폭포들이 참 많습니다. 큰샘실 폭포, 상직폭포, 청룡폭포와 황룡폭포 등 이름을 가진 폭포와 이름 없는 수많이 폭포들이 실핏줄처럼 드러낸 모습이 장관입니다.

5년에 걸쳐 세 번의 걸음을 하고 보니 달라진 미천골의 모습들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처음 미천골을 찾았을 땐 오가는 사람 한둘이나 보았을까, 한적하기 그지없는 골짝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또 다른 변화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운 시설물들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지금 짓고 있는 산림관을 비롯, 휴양림관련 시설들이 많이 늘어 있습니다. 미천골의 아름다움을 함께 보고 즐기는 것이야 나쁠 것은 없겠지만 사람을 위한 시설물을 세우느라 아름다움을 헤치는 일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갑니다.

드디어 차단기가 있는 마지막 주차장에 도착합니다. '멍에정' 앞입니다. 이제부터는 차가 아닌 두 발만이 미천골의 진입을 허락한다는 뜻입니다. 차차 고도가 높아집니다. 완만한 비탈길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옆에 있던 계곡물이 어느 순간 저 아래로 멀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계곡물은 벼랑 저 아래서 쉼 없이 흐르고 바로 곁엔 아름답게 물든 단풍 든 산길이 이어집니다. 가도가도 길은 끝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단풍길도 지루하다 느껴질 순간에 산모퉁이가 나타나 지루함을 덜어줍니다.

생강나무, 산겨릅나무, 피나무, 싸리나무… 노란 단풍이 아름다운 틈새로 유독 푸르른 나무들이 있습니다. 늘씬한 키를 자랑하는 전나무들입니다. 미천골의 전나무들은 계곡 벼랑 끝에서 늠름하게 자라고 있어 눈길을 끕니다. 더러 하늘 향해 팔 벌리듯 양 가지가 가지런한 나무들도 보이지만 대개는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한쪽으로만 가지를 뻗은 모양입니다.

벼랑 끝을 향한 전나무를 보면서 인생을 생각합니다

a 가을빛에 얼마나 흔들렸기에 이토록 눈부실까.

가을빛에 얼마나 흔들렸기에 이토록 눈부실까. ⓒ 김선호

a 아이가 인생을 묻거든, 미천골의 전나무를 보여주시길.

아이가 인생을 묻거든, 미천골의 전나무를 보여주시길. ⓒ 김선호

무슨 까닭인지 벼랑 쪽을 향해서만 가지를 뻗어 아슬아슬해 보이는 전나무도 있습니다. 보는 내가 그리 볼 뿐, 전나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오대산의 월정사나, 부안의 내소사 전나무는 간결해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는 미천골의 전나무에 더 마음이 갑니다. 살아 있는 듯 꿈틀대는 전나무는 미천골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업시간에 '인생이 뭔가'라는 철학적 주제를 처음으로 접한 큰아이에게 전나무 한 그루를 보여줍니다. 벼랑 끝을 행해 가지를 뻗은 특이한 나무입니다. 그러고도 둥치를 튼실하게 키운 전나무를 함께 바라보며 인생이라는 주제를 대입해 보자고 제안합니다.

전나무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 있었고, 그럼에도 전나무는 환경에 굴하지 않고 푸르고 늠름하게 자라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갓 십대에 진입한 아이는 살아가면서 조금씩 '인생이 뭔가'라는 주제를 자문(自問)하고 자답(自答)해 가겠지요. 그때마다 미천골의 전나무를 떠올려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인 저에게도 미천골의 전나무는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불바라기 약수터가 가까워 옵니다. 길은 다시 수굿해져서 남아 있던 모든 긴장들을 무장해제 시켜 버리는 길로 이어집니다. 임도가 끝나고 시작된 오솔길은 감질나게도 곧이어 시작된 계곡 앞에서 끝이 납니다. 계곡을 건너면 그곳에 전혀 새로운 세계가 기다릴 것 같습니다.

그곳에 전설의 이야기에나 나올 듯한 푸른 용과 붉은 용이 살고 있는 폭포가 있다 합니다. 불바라기는 청룡과 황룡폭포 그곳에 도달한 이에게 한 모금의 '알싸한 생명수'를 맛보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a 여기에 잠시 마음의 짐을 다 부려 놓아도 좋으리.

여기에 잠시 마음의 짐을 다 부려 놓아도 좋으리. ⓒ 김선호

a 다시 걸어도 좋으리.

다시 걸어도 좋으리.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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