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사과 한 알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우리 반의 특별했던 '학생의 날' 풍경

등록 2006.11.04 15:16수정 2006.11.04 20:13
0
원고료로 응원
“아저씨 이 사과 한 상자에 얼마죠?”
“1만6000원입니다.”
“몇 개나 들었지요?”
“쉰 네 개요.”

a

ⓒ 이기원

출근길에 청과물 시장에 갔습니다. 학생의 날에 우리 반 녀석들에게 무얼 사 줄까 고민하다가 사과를 한 알씩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우리 반 녀석들이 38명이니 사과 한 상자가 최소한 38개는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알이 작은 상자를 물어봤더니 54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 상자는 얼마에요?”
“그건 2만8000원입니다.”
“몇 개나 들었지요?”
“거기 써 있잖아요. 서른여섯 개.”
“두 개 모자라네.”
“네?”

영문을 모르는 청과물 시장 아저씨가 의아한 눈초리로 쳐다봤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사줄 건데 두 개 모자라네요.”
“아, 선생님이세요?”
“네, 학생의 날이라 애들에게 사과 하나씩 주려고요.”
“그러세요. 그럼 이거 가지고 가세요.”
“두 개 모자라는데….”
“두 개 정도야 더 드리지요.”
“아, 고맙습니다.”

청과물 시장 아저씨의 도움으로 우리 반 숫자대로 사과를 샀습니다. 트렁크에 사과 한 상자를 싣고 학교를 향하는 기분이 무척 상쾌했습니다.

7교시 자습이 시작되기 전에 경술이와 기홍이를 불러 사과를 교실로 가지고 가게 했습니다. 학년부에서 준비한 초코파이와 요구르트와 함께 사과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거 우리 줄 건가요?”
“그래.”
“이야, 빨리 주세요.”
“이런, 난 이 닦았는데.”
“잘됐다. 내가 대신 먹어줄게.”

먹을 게 눈에 띄자 녀석들의 표정이 무척 밝아졌습니다. 입맛을 다시는 녀석들을 조용히 시키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오늘이 학생의 날이다.”
“어? 정말이네.”
“난 그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학생의 날이 특별하게 아이들에게 기억될 만한 날은 아닙니다. 학생의 날 행사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침 일찍 나와 늦은 밤까지 공부와 자율학습을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학생의 날을 기억하는 녀석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 녀석들에게 학생의 날에 대해 간단히 얘기를 해주고 초코파이와 사과를 나누어줄 준비를 했습니다.

“이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는 2학년부에서 준비한 것이고, 사과는 담임인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아이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습니다.

“며칠 전부터 학생의 날이 되면 우리 반 녀석들에게 무얼 사줄까 생각하다가 청과물 시장에 가서 사과 한 상자를 사왔다. 지금까지 담임이 되어 너희들과 생활하면서 잘해야지 생각도 많이 했지만 때로는 화도 내고 때로는 감정을 먼저 앞세우면서 너희들 마음 상하게 했던 적도 꽤 있었던 거 같다. 그동안 지내오면서 담임인 나에게 가지고 있던 섭섭한 마음 있으면 이 사과를 받으면서 풀기 바란다.”

학급 담임이 되어 생활하다보면 아이들 입장이 아닌 담임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아이들에게 따르도록 강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에서 생활하는 건 아이들만이 아니라 고등학교 교사들도 동일합니다. 힘들고 지치기는 아이들이나 교사나 다를 바 없습니다.

힘들고 지칠 때면 짜증도 나고 그러다보면 필요 이상의 야단을 칠 때도 있고 공연히 감정을 앞세울 때도 있습니다. 저지르고 나면 후회도 되고 미안한 마음도 생기지만 아이들 불러 미안하다 사과하기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과하는 의미로 주는 사과라는 대목에서 잠시 숙연해하던 녀석들은 사과 하나씩을 받아들자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손으로 사과를 움켜쥐고 반으로 자르겠다며 용을 쓰는 녀석, 소매에 몇 번 문질러 와삭 베어 먹는 녀석, 책상 위에 보기 좋게 놓고 웃으며 지켜보는 녀석, 누구 사과가 더 큰가 비교하는 녀석….

녀석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 교실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교무실로 돌아오니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습니다. 사과를 받은 녀석들이 고맙다고 보내는 문자가 연이어 전송되고 있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한전 '몰래 전봇대 150개', 드디어 뽑혔다
  2. 2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3. 3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갚게 하자"
  4. 4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5. 5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