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라이트청년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4일 오후 인천공항에서 민노당 방북단 귀국에 맞춰 집회를 열고 '민노 방북단은 북으로 돌아가라'며 항의구호를 외치고 있다.연합뉴스 김병만
강모씨가 자신이 80년대 주사파의 총책으로서 조직원들에게 김일성에게 충성맹세를 하게 했던 장본인이라며 현역의원 실명까지 거명하며 전향여부를 다그치는 모습을 보면서 애처로운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18년 유신통치가 10·26으로 끝나자 억눌렸던 민주화 요구가 80년 광주항쟁으로 불타올랐지만 집권욕에 불타는 신군부에 의해 유혈진압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광주는 80년대 활화산과 같은 이 땅 민주화운동의 용광로였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학살도 마다않았던 것은 사실 친일세력들의 통치기반을 고스란히 물려받기 위함이었다. 이 현대사의 대 사건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외세 그리고 민족 분단이라는 화두를 일목요연하게 던져주었다.
386세대들의 삶, 비판 받아 마땅한가
80년 5월의 패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낭만적인 민주주의만으로는 철권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바로 대학생들이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제3세계 해방운동이 도움이 될까? 민중신학의 십자가를 붙잡을 것인가?
철권통치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어떤 것도 수단으로 할 수 있다는 절박함이 당시 대학생들의 심리적 상태였다. 그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핵심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일컬어 '운동권'이라 했고, 지금은 386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의 중등교육과정상 철학적으로 천박한 인식체계를 가질 수밖에 없도록 교육받은 대학생들은 복잡한 한반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명료하게(물론 편향되지만) 사물을 인식하게 하고 적대적인 군사정권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전략전술을 제공하는 이념이 필요했다.
당시 대학가 서점은 이러한 사회과학서들로 넘쳐났다. 대부분이 금서목록이었고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면 '이 책들을 읽고 북한에 이익이 되는 점을 알면서…'라고 시작되는 진술서를 써야만 했다.
아주 일천한 수준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 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이런 이념 때문이라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동구의 사회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전두환 정권의 말기적 탄압도 극에 달할 무렵, 한국의 저항운동은 더 이상 동구의 사회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일부 치열한 논쟁도 이루어졌다. 이것이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이었다.
때를 같이하여 학원가에는 주체사상과 북한에 대한 이해를 달리하며 저항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하던 분파가 있었다. 소위 주사파 NL세력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우리의 문제는 분단과 떼어놓고 사고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면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있고 참고할 수 있고 손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여기에 주체사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외계인의 사상도 있었다면 차용했었을 것이다.
6월 항쟁은 이런 운동권들과 다양한 계층의 국민들이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리고 직선제 쟁취라는 공동의 목표에 힘을 모았다. 철권통치는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감옥을 가려고 줄을 서 있는 대학생들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당시의 그 숱한 공안사건들과 젊은이들의 희생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만큼 아직도 생생할 것이다.
노태우, 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정권과 운동권 모두 서로를 완화시켜나갔고 이 와중에도 각종 공안사건, 간첩단 사건은 심심치 않게 특히 대선을 전후해 나타났었다. 급기야 한국의 민주주의는 DJ정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사건을 만나면서 민주주의가 확대되고 그에 비례해서 운동권의 경직성도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제는 사회 각 부분이 이해관계 조정을 위한 싸움이 대부분이고 체제나 이념을 논하는 싸움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최근 소위 '386간첩' 사건도 과거와 같으면 남산지하실에서 온갖 매질을 당하면서 대형사건으로 만들어질 수 있을 수도 있었는데, 뺨 한 대 때릴 수 없고 야간구금 장소도 국정원이 아닌 서초경찰서로 법대로 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은 좋아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80~90년대에는 남산 지하실에 갇히면 서류상으로는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묵비권이 어디 있는가. 묵비권은 곧 구타와 고문의 동기유발일 뿐이었다. 사실 어떠한 경우에도 구타와 고문을 할 수 없는 세상을 만들고자 그 숱한 구타와 고문을 당하지 않았던가?
나는 가끔 절대 상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상상해본다. 전두환이 29만원 밖에 없다는데 우리가 당한 대로 딱 하루만 하게 한다면 다 밝혀낼 수 있을텐데… 하는 정말 해서는 안 되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우리는 80~90년 20년을 살았다. 그것은 일부 운동권의 인생역정이 아니라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겪었던 역사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386은 변화 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