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가족사진' 걸고 싶다

등록 2006.11.30 14:06수정 2006.12.0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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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오래 전부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꿈이 있었습니다. 참 말하기도 쑥스러운, 말하자면 그것도 꿈측에 드냐는 핀잔을 받기 똑 알맞은 메뉴 중에 하나지요. 가끔 아는 이들의 집을 방문할 때 그 집 거실 벽 중앙에 음전하게 자리잡은 가족사진을 볼 때마다 왜 그렇게 그것이 부럽던지요.


부부가 나란히 어깨 기대고 앉은 뒤편에 병풍같이 둘러선 자식들. 든든한 울타리처럼 부모를 떠받치고 선 자식들을 보면 그 집안의 당당함과 누구도 침범 못할 가족애를 확인하는 것 같아 정말 부러웠습니다. 그리곤 나도 언젠가 우리 네 식구 가족사진을 꼭 찍어 거실 한가운데 턱 걸어놓으리라 야무진 꿈 한 마당을 가슴 속에 차곡차곡 쟁여놓곤 했었지요.

하기사 우리에게도 가족사진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우리 아들 백일 때 찍은 가족사진입니다. 시흥이었던가? 동네조차 가물가물한, 어느 동네 허름한 골목길에 있었던 사진관이었지요. 너무 허름해 흡사 달동네 구멍가게 같았던 사진관이었는데 우리는 그때 사진기술이 괜찮은지 아닌지 따지고 들 계제가 아닌 처지였습니다.

아들 낳은 지 한 달만에 남편이 수배를 당해 도망을 다녔기 때문입니다. 도망을 다니면서도 아들 백일이 걸렸던지 간첩 접선하듯 서울시내를 뱅뱅 돌며 미행자를 따돌리고 간신히 해후한 네 식구. 연년생이라 기저귀도 채 빼지 못한 딸아이와 젓먹이 아들을 들쳐업은 피난민 행색으로 만났지만 그저 네 식구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습니다.

80년대 중반, 그때 남편을 잡는 수사관에겐 '1계급 특진'을 시킬 만큼 남편에 대한 혐의가 무거웠던 때였습니다. 집시법과 보안법 혐의의 주요 수배자를 숨겨주면 그 사람까지 구속하던 엄혹한 시절, 우리를 아는 사람은 사돈의 팔촌까지 샅샅이 뒤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남대문시장에서 시계방을 하시던 주인 집 아저씨 가게에 진치고 앉아 장사를 방해하는 형사들 때문에 주인 아주머니는 '제발 우리 살려주는 셈치고 나가달라'고 내게 사정까지 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들 백일기념 가족사진
아들 백일기념 가족사진조명자

사진 속의 네 식구 중 행색이 멀쩡한 사람은 남편뿐입니다. 수배자일수록 제일 신경을 써야 되는 부분이 바로 외모이기 때문입니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뿔테안경. 수배자들이 흔히 썼던 변장술이지요. 안경만 빼고 앉은 남편 옆에 내 모습은 한 마디로 열흘 정도 굶은 아낙네 모습입니다.


퀭한 눈에 각진 턱. 고단한 삶이 그대로 얼굴에 배여 가뜩이나 예쁜 얼굴이 더 예뻐(?) 보이는군요. 그런 내 품에 꼭 안긴 아들. 이 사진의 주인공입니다. 자다 깨 놀랐는지 동그란 눈망울과 벌린 입, 게다가 앞머리까지 박박 밀어버린 모습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때가 아들 퇴원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던가 봐요.

아빠가 수배를 당한 얼마 후 아들이 폐렴으로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열이 펄펄 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갓난쟁이를 들쳐 없고 아장아장 걷는 딸아이 손을 잡아끌며 가는데 업힌 동생이나 기저귀 찬 저나 아기인 건 피차 일반이라 생각됐던지 딸아이가 저도 업어달라고 떼를 쓰며 주저앉았습니다.


"업어 줘, 업어 줘."

악을 쓰며 발버둥을 치는 딸아이 볼기짝을 갈기며 나도 어린애처럼 울어 버렸습니다. 민주화운동이고 나발이고 너무 힘드니까 남편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흐느끼는 딸아이 손을 질질 끌고가며 '애비나 새끼나 왜 나만 못살게 구는 거야.' 신세한탄을 하며 전철 고가도로를 건너 병원에 당도했는데 아들을 진찰한 의사가 당장 입원을 시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85년 그때는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입니다. 입원보증금 20만원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 많은 돈이 내게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나와 같은 처지인 민청년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들 남편 역시 구속되거나 수배된 신세였지만 딱한 내 처지를 보듬어 줄 유일한 보호자였기에 망설임없이 연락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시일반으로 부랴부랴 마련해 준 입원보증금으로 아들은 무사히 치료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너무 갓난쟁이라 혈관을 제대로 찾을 수 없어 앞 머리를 밀고 링거바늘을 꽂았는데 여린 혈관은 쉴 새 없이 터져버렸습니다. 바늘 꽂을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들을 보는 내 마음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간호사는 앞 머리 여기저기 마구 바늘을 찔러대 내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던 기억, 그것은 그대로 악몽이었습니다.

가족사진 찍는 데 대단한 거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꼭 찍어야 될 사정이 있었다면 못할 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여유조차 사치에 해당할 만큼 사는 것이 각박했던 세월이었습니다. 사람 사는 재미가 무엇인지, 그저 굶지 않고 병들지 않고 감옥에 갇히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매 순간순간이 전쟁 같았던 생활을 견뎌내고 두 아이 예쁘게 자라주었습니다. 어디 내놔도 한 곳 빠질 데 없는 자식들 바라보니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은 기분입니다. 말타면 종부리고 싶다고 더 늙기 전에 가족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지지 뭡니까.

마침 얼마 안 있으면 아들도 입대를 할 것이고 딸아이 역시 취업준비에 눈코 뜰 새 없을텐데 이때 놓치면 네식구 모이기도 힘들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에게 가족사진 얘기를 넌즈시 건넸더니 대찬성입니다. 딸이 찬성하면 제 아빠는 자동으로 달려올 것이니 시간조정만 하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딸과 아들은 제 모습이 그대로 꽃이니 꾸미고 자실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잔주름이 방사선처럼 촘촘히 퍼져 그대로 할머니가 다 돼버린 나, 그러나 사진 속에서만큼은 아름답고 싶습니다. 미장원 가서 머리도 예쁘게 하고 화장발 속에 잔주름도 감쪽같이 감출 생각인데 괜찮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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