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 설명회에서 입이 벌어지다

1년 수업료 1천만원... 거기서 무얼 배울까?

등록 2006.12.07 10:54수정 2006.12.0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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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유치원에서 배운다는 프로그램
영어 유치원에서 배운다는 프로그램이선희
이번 달 초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한 영어유치원의 신입생 모집 설명회에 다녀왔다.

사실 '영어유치원 설명회'인 줄 알고 간 것은 아니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영어학원 설명회'라고 해서 학원에서는 어떻게 영어를 가르치나 궁금한 마음에 따라나선 것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1학년생 아이와 3살짜리 아이를 키우고 있는 평범한 가정주부다. 그 이웃도 나처럼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키우고 있고, 아이를 영어학원이든 공부를 가르치는 학원든 보내본 일이 없던 탓에 유치원을 학원으로 잘못 안 것이었다.

이웃과 함께 다녀온 영어유치원 설명회

@BRI@어찌됐든 이왕 설명회에 왔으니 하는 마음도 있었고, 유치원이나 학원이나 영어를 가르치는 것은 같으니 어떻게 가르치는지 알아서 나쁠 것은 없다라는 마음도 생겼다. 마침 그곳은 유치원이 학원도 겸하고 있는 곳이기에 설명회를 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이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문성을 강조하듯 유치원 내부의 인테리어는 돈을 들인 흔적이 역력했고, 고급 시설임을 강조하듯 설명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과일 몇 가지와 차 몇 가지를 뷔페식으로 준비해 자유로이 먹을 수 있게 해 놓았다.

영어유치원 직원은 설명회를 하는 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이의 생년월일과 이름, 그리고 전화번호를 쓰라고 했다. 나와 이웃은 쓰라는 것을 쓰고, 설명회 장소로 들어가 앉았다. 설명회에 장소에 들어가 앉으니 필요하면 필기하라며 볼펜을 한 자루 주었다.


나와 이웃 외에도 30여 명의 사람들이 영어유치원 설명회에 와 있었다. 내가 앉은 자리의 오른쪽 끝에는 외국에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얼굴색 다양한 사람 여섯명 정도가 앉아있었다. 영어유치원 강사들이라고 했다.

설명회를 시작하자 영어유치원에 다닌다는 여자아이 둘이 나와 영어로 길게 무언가를 외운 것을 이야기 했다. 다음엔 대한민국 최고 국립대의 명함을 가진 강사가 나와서 영어유치원의 프로그램에 대하여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강사는 5세에 '파닉스'(영어 알파벳이 가지는 소리를 익혀 영어 단어를 보고 발음하는 것)를 하고, 글씨가 전혀 없는 책으로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등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주면 영어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가르쳐 놓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면 학기 중간에 행사로 할로윈 파티를 하기도 하며, 영어로 외국 역사나 문화도 가르쳐 준다는 말도 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영어단어를 쉽게 읽고 말하는 '파닉스'라는 것이 5세의 아이가 1년을 배워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5세에 시작하여 7세 초까지 배워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 식으로 하면 한글 읽는 것만 가르치는 것에 만 2년 이상을 투자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는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영어도 한글과 매한가지인 소리글자인데, 읽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니….

어쨌든 영어 프로그램의 우수성에 대하여 한참을 듣고 나니, 수업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일단 수강료는 월 62만원이라고 하였다. 상당한 액수였다. 내가 첫 아이를 보냈던 유치원 수강료의 두 배가 됐다.

그런데 영어유치원에 보내는 비용은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영어유치원은 교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는데, 동복은 8만원, 하복은 아직 값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입학금도 있다. 입학금은 20만원이 든다.

이게 다는 당연히 아니다. 재료비 명목으로 1년에 35만원에서 40만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돈은 꼭 '현금'으로 내야한다고 강조를 한다. 여기에 외부 견학이나 사진 촬영이 있으면 따로 또 돈을 내야한다고 덧붙였다.

'그런가 보다', '참 비싸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설명회 사회자가 확 깨는 이야기를 했다.

영어유치원에서는 영어 외에도 아이들에게 시중에 나와 있는 교재로 국어와 수학도 가르쳐 주는데 10여만원의 돈을 따로 내면 된단다. 물론 국어와 수학은 대한민국 말로 가르쳐 준다.

입이 떡 벌어졌다. 왜 입이 벌어지는지는 내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자꾸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어 귤을 하나 집어 대강 껍질을 벗겨 입에 넣었다. 내가 대강 계산해봐도 대한민국 말로 배우는 국어, 수학을 제외하고도 1년에 1천만원 정도의 돈이 들어갔다.

거기서 무얼 배울까?

사실 영어유치원 설명회는 무슨 '쇼'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쇼란 과장과 치장이 기본이 된다. 영어유치원을 나와 이웃은 분노했다. 영어로 우리나라 역사를 가르쳐 준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도대체 외국 어느 나라 무슨 역사를 얼마나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겠느냐는 것이다.

이웃은 아이들에게 사대주의만 심어줄 수 있다고 우려했고, 나는 심리적 국제미아를 만들 수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농 삼아 던진 말이 아니라 내가 느낀 실제가 그러했다.

우리나라 벽사(辟邪 : 요사스러운 귀신을 물리침)의 의미가 있는 나례(儺禮 : 민가와 궁중에서, 음력 섣달 그믐날에 묵은해의 마귀와 사신을 쫓아내려고 베풀던 의식)도 모르는 아이가 먼 나라의 할로윈을 안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 이웃은 올 초 유럽을 여행하고 왔는데 여행을 마치고 내게 "우리 아이들이 주체성 없다면 세계에서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라는 말을 먼저 했다. 나도 그 생각엔 전적으로 동감이다. 자신의 정체성이 확실해야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흔들리지 않고, 그들의 장점을 취하고 약점을 비켜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영어 유치원 설명회를 보면서 참으로 착잡했다. 온 나라가 영어, 영어하며 가히 영어 광풍이 불고 있다. 그러니 5세부터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동네(도봉구 창동)는 그리 여유 있는 동네는 아닌데도, 대여섯 개의 영어유치원 차가 아파트 단지를 다닌다.

주변에 영어유치원을 보내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나는 형편이 영어유치원을 보낼 정도가 되지 않아 영어유치원은 생각지도 않고 있지만, 혹시 로또에 당첨되어 억대의 돈이 생긴다 해도, 내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에 보낼 생각은 없다.

우리는 혹시 매우 비싼 돈을 들여 영어만 잘하는 세계화 시대의 미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내 딸과 아들이 진정 받아야 하는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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