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 내린 아침의 짧은 산행

[포토 에세이] 겨울의 빛깔 2

등록 2006.12.11 15:22수정 2006.12.1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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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낙엽송 숲 가득 내린 눈. 어느 북반구의 엽서를 받은 것 같은 아침 풍경

낙엽송 숲 가득 내린 눈. 어느 북반구의 엽서를 받은 것 같은 아침 풍경 ⓒ 최성수


강원도 산간 지방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금요일 저녁 차를 몰아 고향 집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가는 길에 비가 조금씩 흩뿌리더니, 집에 도착한 밤중부터 기대했던 눈은 안 오고, 주룩주룩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눈 대신 비가 온다는 말에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강원도는 겨울이면 눈이 와야 되는 거 아니야?”
볼 멘 녀석의 목소리에 눈에 대한 기대가 가득 묻어 있다.

@BRI@토요일 아침, 아직 사방이 어둑어둑한 새벽에 눈을 떴다. 얼른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니, 세상에 온통 하얀 눈이 천지를 덮고 있다. 어제 저녁에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해 세상을 가득 덮어버린 것이다.

앞 산 낙엽송은 함박눈을 덮어쓴 채, 그대로 엽서 속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집 뒤 소나무에도 눈은 마치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쌓여 있다. 때때로 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흔들고 지나갔지만, 그 정도 힘으로는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듯, 눈은 솔잎에 앉은 채 요지부동이다.

“진형아, 눈 왔다. 온통 눈 천지다.”

내가 방으로 들어와 소리를 지르자, 녀석은 아직 채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가더니 환호성을 지른다.


“와, 눈사람도 만들 수 있겠다.”

녀석의 말대로 찰진 눈이었다. 조금만 뭉쳐 굴려도 이내 커다란 눈덩이가 될 정도로 잘 달라붙는 눈이다.


a 구룽당 마른 꽃 위에 다시 눈꽃이 피었다.

구룽당 마른 꽃 위에 다시 눈꽃이 피었다. ⓒ 최성수


아침을 먹고 장갑과 모자를 쓴 녀석은 마당으로 달려 나가 눈사람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 나도 나가 함께 눈사람을 만든다. 이내 마당가에는 다리와 팔이 없이 시커먼 눈과 코, 입을 매단 눈사람이 들어선다. 눈사람은 우리 집을 지키는 망부석처럼 흰 겨울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찬 바람과 맞서고 있다.

어느새 늦둥이의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머리카락을 타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한 겨울의 신나는 놀이에 녀석은 신이 나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자, 이제 산에 가 보자.”

내 말에 아내는 주섬주섬 보온병에 차를 담고, 간식거리를 챙겨 작은 배낭에 메고 나선다. 우리 세 식구는 눈사람에게 빈 집을 맡겨두고,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따라 숲으로 들어선다.

a 산으로 오르는 길, 골짜기 마른 개울에도 눈으로 환한 세상이 밝혀져 있다.

산으로 오르는 길, 골짜기 마른 개울에도 눈으로 환한 세상이 밝혀져 있다. ⓒ 최성수


a 소나무 너머 겨울 숲이 가슴을 아득하게 만든다.

소나무 너머 겨울 숲이 가슴을 아득하게 만든다. ⓒ 최성수


순백의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내며 걷는 걸음은 기쁘면서 한 편으로는 엄숙하기까지 하다. 길 가로 큰 키를 늘이고 서 있는 구룽당 마른 꽃잎에도 눈이 가득 내려앉아 있다. 층층나무에 쌓인 눈은 오 층이다.

해마다 한 층씩 가지를 뻗어가며 자라는 나무가 벌써 오 층짜리 집을 지은 것이다. 서리가 내려 제 빛을 잃고 칙칙해 가던 숲 속의 온갖 풀 위에 내린 눈은 가을의 쓸쓸하던 풍경을 지우고, 빛나는 눈 세상의 환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인삼 밭을 지나고, 은행나무 묘목을 심어놓은 언덕을 지나자 길은 가파른 산으로 이어진다. 쌓인 눈에 몇 차례 미끄러지기도 하며, 우리 가족은 신이 나 산을 향해 올라선다. 콩을 심었던 비탈밭을 가로질러 산으로 들어선다.

길도 없이 가파른 산에 눈이 쌓이니 한 걸음 내딛기도 힘이 든다. 내가 앞에 서고, 늦둥이를 가운데 세우고, 아내가 제일 아래 선다. 나는 앞서 가면서 산 길 오르는 법을 아이에게 가르쳐준다. 먼저 디딘 발에 힘을 주고, 주변에 나무를 잡고, 무게 중심을 앞쪽으로 하고, 내 말을 알아듣는지 아닌지, 아이는 깔깔거리며 눈길을 오르다 미끄러지고 구르기도 한다.

그래, 인생에 어디 정답만이 있다더냐, 걸어가는 길이 바로 답이 되는 것이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길을 오른다. 싸리나무와 소나무가 사이좋게 숲을 나누어 자라는 산에는 소복하게 눈이 쌓여 있고, 눈 아래에는 또 낙엽이 푹푹 빠질 정도로 덮여 있다.

a 제 몸 가득 눈을 덮어쓴 아기 소나무. 저 눈의 무게를 이겨내야 봄 맞으리라.

제 몸 가득 눈을 덮어쓴 아기 소나무. 저 눈의 무게를 이겨내야 봄 맞으리라. ⓒ 최성수


제 잎 다 떨구고 마치 죽은 듯이 알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이 걸음을 막아선다. 이리저리 나뭇가지를 헤치며 산길을 오른다. 저 소나무 아래에는 노루발풀이 가득했었지, 저기는 봄이면 동박나무가 노랗게 꽃을 피웠던 곳인데, 나는 산길을 걸으며 겨울 속에 지워진 다른 계절의 모습들을 기억해낸다.

산비탈을 다 오르자 눈앞에 임간 도로가 나타난다. 사람 자취 하나 없이 소복하게 눈만 쌓여 있는 길. 이 길은 상안리의 산을 이리저리 휘감고 놓여 있다. 지난 가을 그 눈부시게 붉고 노랗던 단풍의 길이 이제는 희디 흰 눈의 나라로 바뀌어 있다.

우리 가족은 그 길을 따라 눈을 밟으며 걷는다. 뽀도독뽀도독 눈 밟는 소리가 산을 울린다. 가끔 녹은 눈이 툭툭 떨어지기도 한다. 한 굽이 돌아서자, 길 가에 가득 벌목해 놓은 소나무가 나타난다. 몇 주 전부터 산 속에서 엔진 톱 소리가 나더니, 그 벌목 현장이 이 곳이었나 보다.

a 아무도 걷지 않은 숲 속 눈길을 우리는 하염없이 걸었다. 끝나지 않는 길을 가듯....

아무도 걷지 않은 숲 속 눈길을 우리는 하염없이 걸었다. 끝나지 않는 길을 가듯.... ⓒ 최성수


더 높은 산을 바라보니, 소나무와 잡목이 가득 얽혀 있던 숲이 휑하다. 군데군데 소나무만 놓아두고, 잡목은 다 걷어냈다. 아름드리 소나무도 군데군데 벤 자취가 상처처럼 남아 있다. 간벌을 해 나무가 더 잘 자라도록 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휑한 숲을 바라보는 마음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벌목한 나무를 쌓아놓은 주변으로 생나무 냄새가 가득하다. 그것은 원시의 냄새이면서 나무가 피 흘리는 냄새 같다. 나는 코를 큼큼거리며 나무의 향내를 가득 몸 안으로 받아들인다. 아내와 늦둥이가 얼른 쌓아놓은 소나무 더미에 가더니, 그 중 제일 큰 나무의 나이테를 센다.

“마흔 개야.”

늦둥이가 제가 센 나이테를 큰 소리로 외쳐댄다. 마흔, 마흔, 그 소리가 눈 가득한 숲 속을 울린다. 사십 년의 세월이 저기 베어 넘어져 있다. 베어진 나무를 보면 꼭 그만큼의 세월이 쓰러져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a 안개는 자욱하고, 눈은 쌓이고, 나무들은 그 속에서 흐릿하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안개는 자욱하고, 눈은 쌓이고, 나무들은 그 속에서 흐릿하게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최성수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가던 여행길, 끝도 없이 매달린 열차에 가득 실려 있던 자작나무를 떠올린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베어져 저렇게 인간의 마을로 실려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때 그 나무들을 보며 괜히 마음이 짠하고 아득해졌었다.

오늘 숲길에 만난 베어진 소나무들도 내 마음을 아득하게 만든다. 나는 괜히 잿빛 하늘을 올려다 본다. 내 마음처럼 하늘도 깊이를 알 수 없게 아득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은 산을 굽이굽이 틀며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길 가로 눈을 가득 쓴 나무들이 서 있다. 아내는 자주 걸음을 멈추고, 너무 눈이 쌓여 가지가 부러질 듯 휘어져 있는 나무들을 툭툭 쳐 준다. 눈을 털어낸 나뭇가지는 금방 원래의 자리로 튕겨 올라간다.

순백의 눈길 위에 고라니들 발자국이 수북한 곳도 있다. 인간이 없는 지난밤의 산길에서 고라니들은 신이 나 눈밭을 돌아다녔으리라.

나무에 쌓인 눈은 다 같은 것 같으면서도 서로 다르다. 소나무는 가지 위에 눈을 덩이로 얹고 있다. 싸리나무에 쌓인 눈은 제 가지의 세 배쯤 되게 얹혀 있다. 두릅나무는 찔끔 눈을 매달고 있다.

“모두 꼭 같은 눈을 맞았지만, 그러나 눈을 맞아들이는 모습은 서로 다 달라.”

a 아득한 눈길은 끝 없이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눈의 나라가 있을까?

아득한 눈길은 끝 없이 이어져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눈의 나라가 있을까? ⓒ 최성수


내 말에 늦둥이가 뭘 아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은 한동안 길 가와 숲 속의 나무에 쌓인 눈을 바라보더니 불쑥 한 마디 한다.

“우리 반 친구들도 서로 다 달라요.”

그러더니 녀석은 제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지난 번 시험에서 수학을 하나만 맞힌 친구가 있단다. 그래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말을 하더니 불쑥 한 마디 한다.

“그래도 그 친구가 잘 하는 것도 있어요. 체육이요.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은 잘 하는 게 있대요. 우리 선생님께서 그러셨거든요. 똑같으면 재미없다고요. 저 눈 쌓인 나무들처럼요.”

아, 녀석이 벌써 이만큼 컸구나, 나는 녀석의 말을 들으며 새삼 놀란다. 모르는 사이 아이들은 조금씩 조금씩 크는 법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니다. 나는 녀석이 어느 사이 훌쩍 큰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a 같은 눈도 나무에 따라 쌓이는 모양이 다르다. 서로 달라 아름다운 겨울 풍경.

같은 눈도 나무에 따라 쌓이는 모양이 다르다. 서로 달라 아름다운 겨울 풍경. ⓒ 최성수


숲길을 걷다 새로운 아들 녀석을 만나는 기쁨, 눈 내린 산길을 걷다 새로운 숲의 모습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아침의 산행은 온통 환하게 빛나고 있다.

돌아오는 길, 따뜻한 햇살에 눈이 녹아내린다. 나무 아래에 서면 마치 빗줄기처럼 후두두둑 후두둑 물이 되어 떨어지는 눈 속에서 우리 가족은 돌아내려온 산 위의 풍경을 그리워하며, 우리가 걸어온 산 위를 바라본다. 산 아래보다 추운 탓인지, 위에는 여전히 백설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그 풍경은 아마 지워도 지워도 남아 있는 어린 날의 기억처럼 겨우내내 우리 가족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니아 연대기 속에 갔다 온 것 같아요.”

늦둥이가 마당으로 들어서며 제 느낌을 털어놓는다. 그 영화의 옷장 밖, 겨울 풍경이 눈에 선하다. 어쩌면 오늘 아침 우리가 갔던 그 길은 현실이 아니라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이나 꿈속의 한 부분 같다.

마음 한 켠이 행복으로 그들먹해진 우리 앞에, 빈 집을 한 나절 지키고 있던 눈사람이 빙그레 웃는 것 같았던 것은, 그 아침 눈 속으로 뻗어 있던 숲길이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리라.

a 우리가 없는 사이 우리 집을 지킨 눈사람. 겨울이 지나면 그도 눈의 나라로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다.

우리가 없는 사이 우리 집을 지킨 눈사람. 겨울이 지나면 그도 눈의 나라로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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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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