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조선 시대의 비석이 그렇듯, 비석의 첫머리에 '유명조선국'이라 쓰고 있다.백유선
서울역사박물관의 앞뜰에는 무덤 앞에서 가져온 석물들이 있다. 비석을 비롯해 망주석·장명등·문인석 등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서있는 이 석물들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사진 촬영장소가 되기도 한다. 가끔은 유심히 살펴보는 사람도 있어서 나름대로 박물관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처럼 이 비석들을 살펴보다가 조선 선비들의 사대주의 사상의 일면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다름 아니라 조선 후기에 세워진 두 개의 비석에서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이란 글귀를 다시 보았기 때문이다.
'빛나는 조선국'이 아니었네?
'유명조선국'. 오래 전부터 많이 보아왔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 '조선' 또는 '조선국'이라 하지 않고 '유명(有明)'이란 수식어를 붙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밝은' '빛나는' 정도의 평범한 수식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부터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 말은 '명나라의' '명나라에 속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유명조선국'은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라는 의미이다. 스스로 명의 속국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 안타까운 조선의 처지여.
그렇다고 조선시대를 한심하게만 볼 수는 없다. 당시 명나라는 현실적으로 세계의 최강대국이었다. 그 막강한 힘으로도 그렇고,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당시의 지리관으로도 그랬다.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시작되기 전, 명나라는 이미 수십 척의 배로 대함대를 편성해 아프리카까지 원정을 했을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대국은 힘이 곧 정의요, 그들의 입장이 곧 질서이다. 따라서 맹목적인 저항은 화만 부를 뿐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최강대국 명에 인접해 있는 조선으로서는 이에 맞선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작은 나라로서 어쩌랴, 이것이 현실인 것을.
문제는 이런 상황에 얼마나 주체적으로 대응했느냐 하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상황에 비교적 잘 대처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은 명과 자의반 타의반으로 조공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외교정책이었다. 약소국 조선이 사대(事大)를 하는 형식으로 강대국 명나라의 명분을 살려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