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어주는 첨단과학만이 능사 아니다

[주장] 기초과학에 대한 두 가지 오해

등록 2006.12.14 13:01수정 2007.04.1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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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많은 사람들은 기초과학연구보다는 실용적인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진은 로봇을 연구하는 한 연구실의 모습.(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많은 사람들은 기초과학연구보다는 실용적인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진은 로봇을 연구하는 한 연구실의 모습.(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데, 솔직히 기초과학에 그렇게 투자할 필요가 있나요?"
"사실 돈 잘 버는 첨단기술 분야를 확실하게 밀어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기초과학분야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하면 주변에서 나오는 반응들이다. 내 주변이 아니더라도 이런 결과는 익히 예상된 바일 것이지만, 이 글을 쓰는 내가 기초과학에 직접 몸 담고 있는 물리학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 고개를 갸웃거릴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도 이런 문제가 화제에 오르면 내 주변의 동료 과학자들-초끈이론이나 입자물리, 천체물리 등 그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분야를 전공하고 있는- 중 상당수는 비슷한 반문을 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나는 일종의 '매 맞는 아내의 심정'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남편이 나를 때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은 우리 분야가 좀 더 돈을 잘 벌어다 줬으면 국가나 사회가 이렇게 괄시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까지 내 주변의 무력감과 너무나 닮아 보인다. 그래서 요즘엔 차라리 비전공자를 설득하는 게 나에겐 더 쉬운 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아무리 아내가 잘못해도 매 맞지 않고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돈 한 푼 못 벌어주는 기초과학 또한 최소한의 관심과 대접을 받을 권리는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가 인권은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서만 인정하면서 매 맞는 아내를 집안일로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기초과학의 중요성은 원론적인 수준에서만 인정하면서 그 참담한 현실에 눈감아 버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와 친분이 있는 이 아무개 박사는 이 상황을 "기초과학이 왜 중요하냐는 질문에 '사회발전의 근간이니까'라는 대답만 나오는 한 우리 사회는 아직 멀었다"고 꼬집는다. 그에 의하면 사회발전이라는 것은 곧 과학의 다른 말에 불과하고 근간이라는 말은 기초와 뜻이 같으니, 결국 '사회발전의 근간'이라는 말은 '기초과학'의 동어반복이라는 것이다. 즉, 아직 우리 사회가 "기초과학은 기초과학이니까 중요하다"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초과학에 대한 오해들


기초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의 결과는 몇 단계를 거쳐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는 믿음이다. 이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만 믿고 당장에 먹고 살아야 하니 그런 중장기 투자는 나중에 하자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 그럴까?


기초과학이 다른 모든 분야의 기초가 된다는 말은 그것을 딛고서야만 실제 일상생활에 직결되는 분야들이 온전히 발전할 수 있다는 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초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다른 분야들의 밑거름이 되기뿐만 아니라, 기초 자체가 그야말로 우리들의 '생존의 기초'라는 의미도 된다.

수년 전 미 펜타곤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향후 20년 내 국가안보에 가장 위협적인 요소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 이로 인한 자원 및 식량부족이라고 밝힌 바 있다. 빠르면 2007년경부터 네덜란드 헤이그 같은 몇몇 도시들이 물에 잠기기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기초과학이 뭔가 추상적이고 거창하고 복잡한 공식들이 난무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숨쉬며 살아가는 이 땅, 이 공기, 이 바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생명체 모두에 대한 원초적인 지식의 총합체이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문제들이다.

쓰나미 경보를 제때 울릴 수 있는 능력은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몇 해 전 뼈저리게 절감했다. 해마다 겪는 집중호우나 태풍에 의해 반복적으로 입게 되는 인명·재산손실은 막대하지만 근본적인 국가적인 대책은 없어 보인다. 수온상승으로 머지 않은 미래에 슈퍼태풍이 한반도를 강타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일본 신칸센은 지진감지 10초 내에 정지하는데 반해 한국 KTX는 지진이 났는지조차 모른다. 최근 북한이 핵실험한 위치를 추정할 때 보여준 혼란상은 우리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기 중 방사성 동위원소를 탐지하기 위해서는 미군특수비행기가 떠야만 했다.

이 뿐인가. 한일어업협정당시 우리는 제대로 된 통계자료 하나, 유능한 해양전문가 하나 없어서 일본에만 끌려 다녔다. 일본이 위성사진으로 우리나라 어획고까지 파악하며 치밀한 협상논리를 만드는 동안 우리는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일어업협정은 언젠가는 개정을 해야 하며, 한편으로 중국과는 새로운 어업협정을 앞두고 있다. 어업협정은 한마디로 해양영토에 관한 문제다. 한 나라에 있어 이보다 더 중한 문제가 또 있을까.

게다가 앞으로는 부족한 물과 식량문제가 국가간 분쟁의 가장 큰 이슈가 될 것이라는 데에 많은 전문가들이 의견을 같이 한다. 지금은 우리가 석유가격에 울고 웃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는 미국 카길사가 발표하는 쌀값이나 옥수수값에 나라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 기름 없다고 당장 죽지는 않는다. 그러나 쌀이 없으면 며칠 못 간다. TV 사극에서만 봤던 식량부족·물부족에 의한 사회혼란과 폭동이 21세기에 재현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기초과학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먼 미래의 도약을 기약하는가의 문제 훨씬 이전에 당장 우리의 생존의 문제이며 가장 막중하고도 임박한 국가안보의 문제이다.

둘째, 우리나라가 무슨 돈이 있어 기초과학에 투자하느냐는 믿음 또한 강하다. 과연 그럴까.

얼마 전 국회를 통과한 국방개혁안을 보면 2020년까지 15년간 국방개혁을 위해서 무려 621조원에 이르는 자금이 소요될 예정이다. 한 해 약 40조원이 넘는 돈이다.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체로 우리 국민들은 남북한간의 대치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이런 엄청난 방위비를 수긍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생명과 곧바로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기상학자나 지질학자, 해양수산전문가들을 국가가 중점적으로 길러내는 일 또한 국민의 생명과 재산, 국가안보와 직결되어 있다. 왜 후자에는 연간 4조원이라도 쓰지 않는가?

이뿐 아니다. OECD는 매년 GDP의 0.5% 정도를 가난한 나라 도와주는 데 쓸 것을 권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약 4조원에 육박하는 액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 알겠지만 대한민국이 이런 일로 쓰는 돈은 아주 미미하다. 예컨대, 매년 2조원은 가난한 나라 도와주고, 나머지 2조원은 기초과학에 쏟아 부어도 나라 안 망한다.

그나마 나라에서 심혈을 기울인다고 하는 두뇌한국21(BK21) 사업을 보면 1차 사업이 연간 2천억원씩 7년간 총 1조4천억원, 2차 BK21사업이 연간 3천억원씩 7년간 2조1천억원 짜리에 불과하다. 이렇게 찔금거리기식으로 일을 하다보니 기초과학의 자생력은 기대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그래도 잘 나간다는 물리학의 경우 서울대 물리학과(천문통합) 교수 숫자가 40명을 약간 넘는다. 이는 대한민국 대학에서 제일 많은 숫자다. 그러나 선진국의 경우 어지간한 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서울대의 2배 가까이 된다. 100명이 넘는 대학도 상당수다. 그다지 이름이 높지 않은 오사카 대학이나 나고야 대학도 물리학과 교수가 50명은 넘는다.

기본에 충실한 것이 남는 장사

또 누군가는 우리의 역량을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경제규모나 GDP나 인구 등으로 봤을 때 지금 하는 정도도 적정하지 않은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임계점이라는 게 있다. 물은 100도씨가 돼야 끓는다. 60도나 80도나 99도는 모두 의미가 없다.

대한민국의 기초과학이 자생력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양산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전혀 자생력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그 임계점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입자물리를 연구하는 이론물리학자로서 나도 내 분야 혹은 인접분야에 대해 할 말은 많다. 당장 내년 가을에 가동하기 시작하는 유럽 CERN의 거대강입자충돌기(Large Hadron Collider, LHC)는 인류 과학사의 새 장을 열어젖힐 것임을 이미 예고하고 있다.

올해 노벨 물리학상의 후예라 할 수 있는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 위성은 벌써 3년 전부터 우주로부터 충격적인 데이터(우주에서 정체 모를 암흑에너지가 70%이상이라든지)를 보내오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한국 최초의 우주인 선발하느라 난리법석이지만 정작 중력이론을 제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이 땅에 거의 없다는 현실도 돌아봐야만 한다. 또한 나는 기초과학이 융성하기 위해서조차 인문학이 크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모든 얘기를 잠시 뒤로 접어두고 전공도 아닌 분야를 주로 언급한 이유는 그것이 그만큼이나 절박하다고 느끼는 탓이다. 이후에 내가 쓸 글들이 기초과학에 대한 앞서의 두 가지 오해를 푸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버려야 할 것과 새로이 준비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겠지만, 적어도 기본에 충실한 것만큼 남는 장사도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 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덧붙이는 글 '시민기자 기획취재단' 기자가 작성한 기사 입니다. 기사를 쓴 이종필 기자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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