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정부기록사진집> 제5권에 수록된 '남대문수리기공식(1961.7.21)' 장면이고, 오른쪽은 <정부기록사진집> 제6권에 수록된 '남대문 수문장(1965.3.30)'의 모습이다. 남대문 수리 이전에는 성문 아래에 사람이 기어서 통과할 만한 공간이 남아 있었으나, 수리 이후에는 그 부분이 메워지면서 지표면이 다시 조금 높아진 것을 볼 수 있다.정부기록사진집
1900년 전차선로부설과정에서 지표면이 크게 높여진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어느 시기에 어떻게 남대문 통로의 바닥이 크게 높여졌던 것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해 안타까우나 명백한 답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바닥의 지하구조에 비추어 보건대, 조선시대의 어느 때인가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인위적'으로 남대문 홍예에 흙을 다져 넣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고 하겠다. 특히 세종 때에는 남대문 일대의 낮은 땅을 돋우기 위해 남대문을 전면 개축한 적도 있었으므로, 아마도 이러한 사실과 무슨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그런데 지난 11월 초에 서울시 중구청에서 숭례문 성벽복원과 지반제거에 관한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된 성벽을 복구하는 한편 시굴조사과정에서 드러난 원래의 지표면을 드러내기 위해 1.6m 가량 쌓여있는 표토층을 완전히 걷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모르긴 해도 여기에는 "전찻길을 놓은 사람들의 못된(?) 소행으로 남대문의 원형이 훼손되었으니 이를 바로 잡은 것이 옳다"는 판단과 명분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전차' 때문에 남대문의 원형이 변형되거나 훼손된 사실은 그 어디에서도 확인되질 않는다. 따라서 남대문 성벽의 복원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홍예의 바닥면을 걷어내겠다는 계획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무리 원형복원도 좋지만, 때로 그 원형은 반드시 최초의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최초의 남대문을 후대의 어느 시기에 어떤 특별한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변형하였다면, 그것은 또 그것대로 원형에 준하는 것으로 존중되어야 할 자격이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이나 자료고증 없이 함부로 중앙통로의 바닥면을 걷어내겠다는 계획은 마땅히 철회되거나 유보되는 것이 옳을 듯싶다. 원형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걷어낸 진흙바닥층이 정말로 우리 조상이 남겨둔 특별한 역사의 자료이자 흔적인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구태여 바닥층을 복구해야겠다는 생각이라면 1962년에 벌어진 남대문 전면해체수리 당시에 약간 높여진 부분만을 걷어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 지금은 "전차선로부설 탓… 운운" 하며 성급하게 원형복구를 시도할 때가 아니라 무엇 때문에 바닥이 높아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원인규명이나 문헌조사에 치중할 때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남대문 통로에 쌓인 바닥흙이 1899년에 이뤄진 전차선로부설과 관계된 것이라고 여전히 믿고 있다면, 그는 다음의 두 가지 물음에도 적절한 해답을 제시해야 할 줄로 믿는다.
'지금 남아 있는 남대문의 성문(城門)은 언제부터 이처럼 그 높이가 짧아진 것인지?' '
'같은 시기에 전차선로가 부설된 동대문에도 이러한 바닥다짐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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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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