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 지원한 애니메이션 <별별 이야기>의 6가지 주제 중에서 맞벌이를 하면서도 가사노동 전부를 책임져야 하는 여성의 일상에 대한 스케치 '그 여자네 집'.인권실천시민연대
'신(新) 이불을 꿰매면서'
-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 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 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엄청난 고통의 시대지만 역설적으로 희망찬 '혁명'의 시대였던 지난 80년대, 노동자 시인 박노해는 '이불을 꿰매면서'라는 시를 통해 비참한 남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가, 집에 와서도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아내(여성 노동자)의 삶을 노래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습니다.
자신도 노동자인 박노해는 어느 날 이불을 꿰매면서 여성들이 가정 밖 현실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가사나 육아노동으로 가정에서까지 '착취' 받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여성의 '가정에서의 해방'까지도 노래한 것이죠.
'인간해방'을 목소리 높여 노래하던 혁명의 시대로부터 20여 년이 흘러왔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불을 꿰매는' 남편을 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가사노동과 육아는 여성 노동자에게 드리워진 깊은 고통이자 굴레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가정에선 누군가 늘 절망을 맛봐야 할 것입니다.
집안일을 해보거나, 아이를 키워 본 사람들은 압니다. 심지어 바깥 직장에서의 노동보다 더 힘들 수도 있다는 것을. 설거지를 하다 보면 참 허리가 아픕니다. 반찬을 만드는 일에는 보통 정성(공부까지 포함해)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잡채를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목이 저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집안일은,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게 말해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공정한 가사 분담 약속하지만...
@BRI@저만 해도 함께 일하는 아내와 가사 및 육아 노동에서의 공정한 분담을 수없이 많이 약속했건만, 번번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똑같이 일하고 들어왔는데, '여성들이 더 많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한다면' 이는 분명 불공정하고 불의한 일입니다! 만약에 남성들이 그런 '부당한' 처지였다면, 그 가열찬 투쟁의지로 아마도 단박에 이런 모순을 분쇄하고, 평등세상을 이뤘을 것입니다. 그것도 가정에서부터.
'아름다운 가게'에 다니는 아내를 위해 도시락 반찬을 마련하면서, 그 예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갖 가사 일과 노동일까지 하시면서, 3남 1녀의 도시락을 챙기시던 어머님을 떠올립니다. 이 땅의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착취'를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그 모진 세월을 감내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말 좀 했다가는 바로 '못된 여자'가 되고 말았지요.
요즘, 세상이 별로 희망적이지 않다고 하고 웃을 일이 없다고들 합니다. 국민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간 수없이 많은 일을 떠올리며, 그 절망들을 걷어내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에 매진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하지만, 그 다짐은 가정에서부터 실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일로 지친 아내(여성 노동자)를 가정에서까지 불공정한 가사 및 육아분담으로 더 힘들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아내들(여성 노동자들)에겐 그것이 조금이라도 웃음이, 희망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감히 이런 다짐을 '신(新) 이불을 꿰매면서'라고 불러봅니다. '신 설거지를 하며', '신 화장실 청소를 하며', '신 아가를 키우면서', '신 앉아서 쉬를 보면서'… 뭐든지 다 좋습니다. 그렇게 '이불을 꿰매면서'는 더 많이, 더 넓게 부활해야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앉아서 일보는(쉬하는) 사람'이라고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전부터 이런 '재밌는' 실천을 해오던 수없이 많은 이들이 있었는데, 시작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제가 소개돼 어색한 마음은 지금까지도 여전합니다.
남성들이 앉아서 쉬하는 것, 함께 사는 여성들은 대찬성입니다. 그것 하나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남성들이 서서 쉬를 하면 좌변기에서는 수없이 많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튄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다 입증됐습니다. 청결과 위생을 생각해서도, 자기 다음에 이용하는 이가 혹시라도 불쾌하고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서라도 어서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한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원래 '좌변기(坐便機)'가 앉아서 일을 보는 기구라는 뜻이지 않느냐, 자기도 오래전부터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참 기쁜 일! 입니다. 남성들에겐 조그만 실천이 가정에는, 여성에게는 큰 웃음이 되고, 큰 희망이 될 수도 있는 법이죠.
또 하나, 화제가 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수영장 등 스포츠시설에 똑같이 한 달 치 돈을 내고도 월경기간에는 짧게는 3∼4일, 길게는 1주일 동안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피치 못하게' 발생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수영장에서도 조금이라도 환불을 해주거나 기간을 연장해주는 곳이 없습니다. 도저히 입수할 수 없는 조건이라는 것을 수영장도 잘 알고 있습니다. 여성 수영 강사의 경우, 월경기간에는 입수해서 지도를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한 달 치 내고 며칠 그냥 빠져도 어쩔 수 없다'는 셈인 것이죠.
생리를 하지 않으려야 안 할 수 없는 가임기 여성의 삶의 조건을 우리가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면, 기간을 연장해주거나 환불해 주는 문제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행히 한 포털 사이트에서 긴급히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그런 경우는 환불이나 기간을 연장해주어야 한다'는 답이 90%가 넘었습니다.
제발이지, 이제는 여성들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쓸데없이 고통받고 억울한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여성들에겐 그것이 남성들이 느끼는 것보다 훨씬 절실할 것이고, 그래서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희망 중의 중요한 하나일 것입니다.
앞으로 개통하게 될 9호선에서는 여성 화장실이 남성 화장실보다 더 넓어서 여성 화장실에서 줄을 서야 하는 여성들의 고통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이렇게 가야 합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정말 좋은 사회 아닐까요?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절망하고 있다면, 여성들은 사회적 절망과 함께 남성 때문에 한 번 더 절망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절망을 치유하는 일은 여남 모두 힘을 합쳐 우리 시민들이 해나가야 하지만, 남성 때문에 생긴 여성의 절망은 남성의 변화를 통해서만이 치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다시 이불을 꿰맵시다. '신(新) 이불을 꿰매면서'를 목 놓아 부릅시다.
추신 : 저 역시 오늘도 아내보다 가사와 육아 일을 덜 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더 노력해야겠습니다. 미안해서 반찬을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역시 만만치 않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주방에서 여성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요.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안진걸씨는 '희망제작소'에서 사회창안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와 희망제작소 홈페이지(www.makehope.org) <희망칼럼>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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