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내기 열혈남아들의 그 아름다운 힘

[리뷰] 사토 슈호의 <해원>과 <헬로우 블랙잭>

등록 2006.12.23 11:01수정 2006.12.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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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나 영화 속의 ‘열혈남아’들이 왜 그렇게도 화려해 보이는 것일까? 그 ‘열혈남아’들은 결국 그 분야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남자라면 한번쯤 불태우고 싶어 하는 그 불씨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그 불씨는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일수록 더욱 화끈하게 불타오른다.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질주가 경제적인 풍족을 이뤄줄 수도 있기 때문이며 ‘시대의 극복’이라는 상징성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구 선수는 미친 듯이 공을 던지거나 방망이를 휘둘렀으며, 모험을 즐기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들은 목표를 향해 눈빛을 불태운다. 그 시절은 바야흐로 ‘열혈’의 시대였다.


@BRI@시대가 변하면서 “됐어, 피곤해”라는 대사로 상징되는 <터치> 등의 만화가 나와 ‘열혈’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남자의 가슴 속의 그 ‘불씨’가 꺼지지 않는 한 ‘열혈’은 절대로 꺼지지 않는다.

<해원>과 <헬로우 블랙잭>의 사토 슈호는 그 작품들을 통해 아직 여물지 않은 ‘풋 사과(?)’의 열혈을 즐겨 그려왔다. 야구 만화에서 ‘열혈남아’임을 과시하는 주인공들은 나이는 어렸어도, 정상급 현역 메이저리거를 능가하는 말도 안 되는 실력으로 고교야구를 평정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풋 사과’의 열혈, 여물지 않은 만큼 부족한 것도 많을 것이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몸으로 부딪쳐 본 적도 드물 것이다.

풋내기 열혈남아, 생명을 만나다

고모리 요이치 글, 사토 슈호 그림의 <해원>. 전 12권이며, 2004년에는 <우미자루>라는 영화로도 제작된다.
고모리 요이치 글, 사토 슈호 그림의 <해원>. 전 12권이며, 2004년에는 <우미자루>라는 영화로도 제작된다.세주문화
사토 슈호의 두 작품, <해원>과 <헬로우 블랙잭>의 주인공들은 새내기들이다. <해원>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이제 막 해상보안관이 됐으며, <헬로우 블랙잭>의 ‘사이토’는 인턴이다. 바다와 병원이라는 무대의 차이는 있지만, 그 공간들과 주인공의 직업은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최전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 바다와 병원은 하나같이 불공평한 곳이었다. ‘다이스케’는 자연의 심술과 그에 따른 한계로, 하나같이 귀중한 목숨을 구하기 위해 ‘피곤한 열혈남아’가 돼가고 있었다. 물론 병원은 더욱 험악하다. ‘의국 마피아’의 권력 놀이나 부당한 현실 앞에 힘없는 인턴 ‘사이토’는 더욱 격렬하게 저항한다.


민간병원 당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술은커녕 정신조차 차리기 어려운 판에 무작정 배를 가르라는 독촉도 받았으며, 의료재정 부족을 이유로 병원 측이 노인의 연명 치료를 중단하자, 환자를 ‘재야의 명의’에게 빼돌려 수술을 받게 한다. ‘사이토’ 역시 ‘피곤한 열혈남아’이기에 앞뒤 안 가리고 이상을 좇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듯 사토 슈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목숨’은 미약한 존재다. 자연의 심술 앞에, 그리고 의료계의 고질적인 비리 앞에 속을 수밖에 없고,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목숨인 것이다. 그 이면은 주인공들이 밑도 끝도 없이 이상만을 쫓다가 현실 앞에 좌절하며 툭 하면 눈물을 흘리고, 고함을 지르는 ‘풋내기’로 그려지면서 더욱 확실하게 부각된다. 하지만 권력도 없고, 능력도 부족한 풋내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토 슈호는 그럼에도 이 작품들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 희망을 찾으려 노력한다. ‘다이스케’는 동료들의 연이은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이 ‘해상보안관’이자 ‘잠수사’임을 뚜렷하게 자각한다. ‘사이토’ 역시 그 피곤한 ‘오버’를 여전히 고집하면서도 점차적으로 성장해나간다.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캐릭터를 향한 작가의 시선 차이는 있어도, ‘열혈남아’들이 걷는 그 길은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열혈남아’가 걷는 길은 끊임없이 강해지고 성장하기 위한 길이다.

‘풋내기 열혈남아’에게도 모성은 필수

<헬로우 블랙잭>, 현재 13권까지 발간
<헬로우 블랙잭>, 현재 13권까지 발간서울문화사
두 풋내기는 모두 모성에 굶주려 있다. ‘사이토’는 고뇌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격려를 아끼지 않는 간호사와 사랑에 빠져 더 많은 것을 의지하며, ‘다이스케’는 남의 애인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결혼까지 생각한다. 특히 ‘다이스케’의 경우에는 ‘어머니’라는 키워드가 해상보안관이 된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한다.

이것 역시 변하지 않은 것이다. 모정에 굶주린 열혈남아들이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토 슈호의 만화에서는 그런 방식으로 변주돼 그려지고 있다. 이 풋내기들은 자신과 사랑에 빠진 여성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걱정거리를 안겨주며 마음을 졸이게 한다. 여성은 이래저래 남성만 바라보면 피곤한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닌 듯하다.

특히나 ‘다이스케’는 목숨을 걸고 남을 구해야 하기에 그의 연인 ‘미하루’로서는 매일같이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다. ‘다이스케’의 선배 ‘이케자와’가 아내와 갓난아기를 두고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눈으로도 목격했기에 ‘미하루’로서는 가슴 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이 느낄 그 불안감을 잘 알고 있는 ‘다이스케’에게 그것은 은근한 강박관념이 된다.

심지어는 ‘미하루’가 싸늘한 눈빛으로 전 애인에게 다시 떠나는 꿈을 꾸기까지 한다. ‘다이스케’는 내일을 약속하기 어렵기에 사랑도 불안하지만, 그럴수록 ‘미하루’에게 더욱 의지하는 것을 느낀다. 남자는 그렇기 때문에 어린 아이다. 현실과 미래가 두려울수록 따뜻한 어머니의 품, 애인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따뜻하게 안겨 쉴 공간을 원하는 것이다.

알콩달콩 꾸며나가는 다정한 사랑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이 풋내기들에게 모성, 혹은 여성의 품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잘 드러난다. ‘사랑’을 가장한 이 풋내기들의 치기에 비하면, 이정범 감독이 연출한 우리 영화 <열혈남아>는 대단히 솔직하다. <열혈남아>는 어머니가 그립고 안기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오늘도 싸우고 있다

데즈카 오사무의 <블랙잭>에 인사를 건네며 도발적인 제목을 잡은 <헬로우 블랙잭>. “무서운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래서 더욱 용기를 내기에 용사”라고 고백하는 <해원>. 이상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이 풋내기들의 싸움이 여전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사이토’의 싸움에서 실질적인 지식도 얻을 수 있어 기억에 남는다. ‘사이토’가 제약회사를 상대로 몸부림치는 과정을 지켜보며, 필자는 가벼운 감기나 두통을 겪을 때 어지간해서는 진통제는 피하게 됐다. 따뜻한 목욕과 충분한 휴식으로 가벼운 감기나 두통은 얼마든지 치유될 수 있음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데즈카 오사무의 <블랙잭>이 외곽에서 의료계의 현실을 짚었다면, <헬로우 블랙잭>은 그렇듯 실질적인 고발을 통해 충격을 준다.

두 풋내기들을 바라보는 ‘선배’들은 그들이 안타까운 나머지 ‘현실’을 강조하며 냉정하게 대한다. 물론 그렇다고 바뀔 주인공들은 아니다. 사토 슈호는 세상은 아름다운 바보의 힘이 통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들의 열혈이 부담스럽고 짜증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 처절한 노력 앞에 쉽게 냉소를 내뱉기 어렵다는 것을 느꼈을 듯하다.

무능하고 약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알기에 더욱 노력하며 몸을 던진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었고, 풋내기의 특권이었다. 이 열정적인 풋내기의 힘이 수천이 되고 수만이 되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사토 슈호의 만화는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피곤하고 짜증나더라도 그 힘은 세상에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사토 슈호는 온 힘을 다 해 그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신문 필진네트워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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