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할머니들께 음식대접했더니...

답례로 쌀과 참기름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시네요

등록 2006.12.29 21:11수정 2006.12.30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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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국수 고명
잔치국수 고명조명자

잔치국수를 장만한다고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습니다. 요리하고는 거리가 먼 여편네지만 그래도 굳이 자신 있는 요리 하나쯤 뽑으라면 '잔치국수' 정도는 1번 타자로 등장시킬 만하거든요. 솜씨 자랑하려고 손님을 초대했습니다. 가을 내내 밭고랑에 엎드려 허리 펼 날 없었던 동네 할머니들. 요즘이야말로 그 양반들이 유일하게 아랫목에 허리 지지는 계절인 셈이니 남아도는 것이 시간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BRI@별 일 없으시면 국수 드시러 오시라고 했더니 모두들 좋아하시며 초대에 응하셨습니다. 보통 농한기인 겨울철엔 할머님들이 노인정에서 단체로 식사를 해결하신다고 하던데 우리 마을에선 삼삼오오 아니면 당신들 집에서 각자 끼니를 해결하시는 편입니다.

동네 전체 노인들 숫자를 얼추 계산해 보아도 스무 분 남짓. 그 양반들 전부를 초대하자니 준비 할 양이 너무 많아 자신이 없었습니다. 해서 눈 질끈 감고 가까이 사는 몇 분에게만 연락을 하곤 잔치국수 양념 준비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습니다.

우선 커다란 스텐 냄비에 물을 채우고 국물 멸치와 다시마를 듬뿍 넣었습니다. 구수한 멸치 국물과 시원한 다시마가 어우러져야 잔치국수 국물이 제 맛 나거든요. 그리고 깐 양파와 마늘, 생강을 넣어 중간 불에 두어 시간 달이면 드디어 진하고 구수한 국수장국이 완성됩니다.

그 다음은 국수에 올릴 고명 차례지요. 당근과 양파는 곱게 채쳐 놓고, 애호박도 곱게 채 썰어 가는소금으로 숨죽여 놓습니다. 소고기와 표고버섯도 가늘게 썰어 다진 마늘, 참기름, 설탕, 후추 그리고 진간장을 넣은 불고기 양념을 해 놓았습니다.

당근, 양파 꼭 짠 애호박을 기름에 볶아놓고 잘 익은 김장김치를 꺼냈습니다. 잔치국수엔 뭐니뭐니 해도 송송 썰어놓은 김치가 들어가야 제 격이거든요. 김치 양념을 털어 내고 송송 썬 김치를 꼭 짠 뒤 참기름과 깨소금으로 맛을 냈습니다.


소고기까지 볶아 놓으니 잔치국수 재료준비가 완벽하게 마련되었군요. 이제 할머니들이 오실 때쯤 국수만 끓여 놓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사실 자식들 외지에 내보내고 혼자 사시는 어른들의 제일 큰 문제점이 끼니 챙기시는 것입니다. 냉장고에 쟁여 있는 재료가 아무리 많다한들 당신 혼자 잡숫자고 지지고 볶고 하실 노인들 있을라구요.

상 다 차렸는데 너무 약소하네요.
상 다 차렸는데 너무 약소하네요.조명자

어쩌다 들른 시간이 하필 밥 때를 맞춰 밥상 앞에 앉으신 할머니들을 뵌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조그만 둥근 소반에 반찬이라고는 김치그릇 하나에 구운 김 통 그리고, 된장 시래기 국그릇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밥그릇. 언제 적에 해놓은 밥인지 주걱으로 쓱 문질러 밥그릇 가에 비스듬히 얹힌 밥알은 힘이 하나도 없는 노리끼리한 색깔이었습니다.


하기야 젊은 나도 나먹자고 매 끼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새 밥 챙긴 기억이 없을 정도인데 하물며 당신 육신 움직이기도 귀찮은 어른들이야. 그 때부터 별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이웃할머니가 걸렸습니다. 어쩌다 손님치레를 할 일이 생기면 늘 양을 넉넉히 준비했지요. 생선 조림이라든가 잡채라든가 혹은 육계장.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여간해서 노인들이 해서 잡숫기 어려운 품목입니다.

그런 음식을 조금씩 갖다 드리면 너무 맛있게 잡수셔 보는 내가 더 행복할 지경이었습니다. 낯선 시골에 흘러 들어온 지 수년 여. 변변한 선물 한 번 못 챙겼던 어른들입니다. 그런 어른들에게 돈 안들이고 생색낼 수 있는 방법, 반찬 나누는 것처럼 실속 있는 선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몇 번 챙겨드렸더니 아 이게 웬 일입니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하잘 것 없는 반찬 몇 번 얻어 잡숫고는 그 답례로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습니다.

방아를 찧으신 어른은 배낭에 하나 가득 쌀을 채워 짊어지고 오시질 않나, 참기름 짰다고 기름병을 들고 오시질 않나. 무면 무, 배추면 배추 나중엔 고추장 된장까지…. 하여튼 당신들이 손수 키운 농작물은 무엇이든지 거둬 먹이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렇게 갖다 주시면서도 매번 볼 때마다 '이 신세를 언제 갚느냐'고 치하를 하시는 어른들. 참 염치가 없었습니다. 오늘 또 이렇게 색다른 음식 대접하면 그 노인들 몇 배로 부담 느끼실 것은 불문가지. 그러나 그 양반들에게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게 부담된다고 어울려 사는 정까지 외면할 수 있나요.

이웃 어른들이 맛있게 잡숫는 모습을 보면 살아생전 며느리 손에 따뜻한 진지 한 번 옳게 대접받지 못한 내 어머님 생각이 납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에 대한 회한을 생각해서라도 친정엄마한텐 조금 더 잘해야 할텐데 멀리 산다는 이유로 여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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