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 시간, 그 표정들을 기억하리

[포토에세이] 4000여개의 촛불로 '행복하세요'를 밝히다

등록 2007.01.02 13:42수정 2007.01.02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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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세요. 4000여개의 촛불로 새해 소망을 그렸습니다.
행복하세요. 4000여개의 촛불로 새해 소망을 그렸습니다.임윤수
생각만 해도 절로 배시시한 웃음을 흘릴 만큼 즐겁거나 기쁜 일들이 있는가 하면 생각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서리쳐질 만큼 고통스럽거나 끔찍한 일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설사 경황이 없어 당시에는 몰랐다 해도 생각하는 것만으로 즐겁거나 기뻐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던 순간들은 분명 행복한 순간이며, 몸서리가 쳐질 만큼 역겹거나 고통스럽게 생각되는 순간들은 '불행'이라고 단정해도 좋을 인생의 여정이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연말연시란 표현이 딱 떨어지는 그날 그 시간, 카운트다운 속에 2006년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그라지고, 새로운 2007년 한 해가 시작되던 2006년 12월 31일 저녁. 적막할 만큼 고요하기만한 산사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그날 밤의 일들을 회상하며 배시시한 웃음을 흘려봅니다.

동짓달 야밤, 보련골 보탑사로 모여드는 사람들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 보련골로 접어든 사람들이 하나둘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에 있는 보탑사 법당으로 모여듭니다.

불나방처럼 불빛을 쫓아 법당으로 모여드는 이 중에는 청장년의 남녀도 있었지만 지팡이를 짚어야 보행할 수 있을 것 같은 할머니들도 계십니다. 게다가 엄마 아빠를 따라 겨우 걸음마를 떼고 미운 짓이나 할 것 같은 예닐곱 살쯤으로 보이는 꼬맹이들도 있습니다.


함께 어울리는 가족의 모습에서 행복이 느껴집니다.
함께 어울리는 가족의 모습에서 행복이 느껴집니다.임윤수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함께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이 행복해 보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리를 함께하는 엄마아빠의 모습이 행복해 보입니다.임윤수
법당 안으로 들어간 200여 명의 남녀노소는 무슨 작당이라도 하려는 듯 아주 차분한 얼굴로 조용조용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해 짧은 동짓달, 밤시간치고는 제법 이슥한 10시가 되니 여기저기서 일정하지 않게 두런두런 피어오르던 이야기꽃들을 접으며 야밤기도를 시작합니다.

@BRI@한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찰나의 순간에 앞서 미처 돌이키지 못했던 허물을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불성을 닮았던 행동이나 마음 씀씀이에는 토닥거리는 칭찬과 관심을 줌으로 조금이라도 더 불성을 닮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독려하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흐르는 세월에 편승해 흘렸거나 간과한 자신의 흉허물을 진지하게 참회하기도 하지만 새해를 설계하고 약속하는 자기 맹세의 시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법당이란 곳이 하루에도 최소 3번 이상은 부처님 전에 마지를 올리거나 기도를 올리는 곳이니 응당 있을 수 있는 기도며 법석이겠지만 여느 때와는 달리 사람들의 표정이 진지하고도 사색적입니다. 진득하면서도 깊어 보이는 표정에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던 내면의 정성들이 지극함으로 드러냅니다.

가정에서는 아가의 재롱도 행복을 만들어 내는 한 요소입니다.
가정에서는 아가의 재롱도 행복을 만들어 내는 한 요소입니다.임윤수
100여 분 동안 지속하던 진지하고도 간절한 기도에 끝 대어 법당을 나서는 사람들은 손마다 촛불 하나씩을 움켜잡고 탑돌이를 시작합니다. 전등 빛 아래서 가물가물 드러나던 진지한 표정들이 촛불 조명을 받아 여운처럼 비칩니다.

밤 공기를 가르는 목탁소리를 따라 소원 촛불을 든 채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기며 탑돌이를 시작합니다. 이미 법당에서 얼마만큼은 업장의 무게를 덜었겠지만 먼지처럼 남아 있는 미소의 업장마저 씻으려는 듯 애절한 발걸음으로 탑돌이를 계속합니다.

4000여 개의 소원 촛불초로 '행복하세요'를 수놓다

종이컵으로 만들어진 소원초 하나씩을 손에 들고 탑돌이를 마친 사람들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널찍한 경내, 이미 초저녁에 만들어져 흔들리는 불빛으로 '행복하세요'를 연발하고 있는 촛불 글씨를 둘러싸고 멈췄습니다. 흙바닥에 종이컵에 든 소원초를 밝혀 그려낸 것이지만 참말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오순도순 연꽃을 만들고 있는 한 가정의 모습을 연등으로 만들었습니다.
오순도순 연꽃을 만들고 있는 한 가정의 모습을 연등으로 만들었습니다.임윤수
땅이라는 바탕천에 어둠이라는 배경색을 깔고 단색의 촛불로 그려낸 수예품, 그 옛날 내 누이들이 혼수품으로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그려나가던 자수품처럼 깔끔하고도 아름답습니다.

4000여 개의 소원초, 하나하나마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나 소원이 담긴 소원초의 빛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고 그 안에 '행복하세요'라는 글씨와 별 문양을 그려 넣어 동심과 환희심을 소망으로 형상화한 그런 수예품입니다.

비록 바람결에 흔들리는 단색의 촛불들로 보이지만 4000여 가지의 소원들이 숫자만큼의 빛깔로 송년의 아쉬움과 영신의 기대감으로 아름아름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에 부정한 짓이라도 될까봐 그런지 누구 하나 '행복하세요'란 말을 건네지 않았건만 촛불을 에둘러 싼 사람들은 얼굴이 벌건 해지도록 행복한 표정들입니다. 지팡이를 놓고 꾸부렁꾸부렁 탑돌이를 하던 할머니의 얼굴에서 소녀 적에나 지었을 것 같은 맑은 미소가 지어집니다.

저녁 기도를 마친 사람들이 촛불을 움켜든 채 탑돌이를 시작합니다.
저녁 기도를 마친 사람들이 촛불을 움켜든 채 탑돌이를 시작합니다.임윤수
어머니를 따라 탑돌이를 하던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는 경탄의 눈빛이 반짝거립니다. 사람들은 감탄하고 또 감탄합니다. 여태껏 풍랑처럼 겪어야 했던 인생팔고쯤 까마득히 잊어버린 듯, 온갖 시름 초연하게 넘겨버린 듯 해맑고도 밝은 표정들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과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가 그래 왔듯 소원초를 든 사람들이 촛불을 움켜잡은 손들을 가슴 높이로 모으더니 꾸벅꾸벅 마음에 정성을 올립니다. 부담이 되거나 화가 될 만큼의 커다란 욕심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살아가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기만을 소원하는 듯 소박한 새해 소망을 기도하는 모습으로 담아냅니다.

땅바닥에서 피어오르는 '행복하세요'란 글씨가 애절한 호소력으로, 진지한 기도문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의 시선과 발걸음을 흡수해 버리는 듯합니다. 정말 행복한 순간이기에 넋이라도 나간 듯 소원초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행복하세요'란 글씨에 매료된 순간에도 시간의 흐름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새해 건강하세요. 그리고 행복하십시오.
새해 건강하세요. 그리고 행복하십시오.임윤수
구랍과 신년을 판가름하는 기로(岐路)의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무아지경의 촛불 삼매에 빠져든 사람들이 줄을 지어 제야의 종, 장엄한 울림으로 12월 그믐밤을 벗어나는 순간이며 새해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년의 출발점에서 퍼져 나갈 범종을 타종하러 갑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을 수도 있는 손목시계가 아닌 휴대전화 시계를 바라보며 열부터 거꾸로 세어가는 이구동성의 카운트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 셋, 둘, 하나!'하고 카운트가 마무리되는 순간 '뎅∼'하는 범종 소리가 밤 공기를 흔들어댑니다.

모두가 한 번씩 타종하는 제야의 종소리엔 새해 소망이 가득

새로운 2007년이 시작되는 출발의 시각입니다. 뒤안길처럼 웅웅 거리는 범종의 울림 속에서도 잠시나마 아주 숙연한 분위기가 사람들 가슴으로 전이됩니다. 너무도 엄숙하고 가슴 설레는 순간이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묘한 파장이 분위기로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땅이라는 천에 4000여개의 촛불로 그려낸 ‘행복하세요’는 한 폭의 수예품입니다.
땅이라는 천에 4000여개의 촛불로 그려낸 ‘행복하세요’는 한 폭의 수예품입니다.임윤수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에게 제야의 종으로 범종을 타종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기다랗게 줄을 선 사람들이 차례차례 제야의 종을 타종합니다. 차례가 되어 범종 앞에 서면, 정갈한 모습으로 합장을 하고, 당목을 매달고 있는 밧줄을 당겼다 힘차게 밀치는 것으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뎅∼'하고 울리는 범종 소리엔 새해소망이 실렸습니다. '뎅∼'하고 울리는 범종 소리에는 고백 같은 사랑이 실려 있고, 바람이 실려 있습니다.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뎅∼, 뎅∼'거리며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마다 나름대로 애환과 개인의 소망이 담겼습니다.

200여 명이 타종을 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과 기다림이 필요했지만 누구 하나 짜증스러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조금씩 당겨지는 차례를 기다리며 행복한 모습만을 뚝뚝 흘린 뿐입니다. 타종을 마친 사람들은 흔적 없이 깔린 행복을 지르밟으며 어떤 이는 휴식을 취하러, 어떤 이는 밤샘기도를 하러 다시금 법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갑니다.

참가한 모든 이들은 각자의 소망을 담아 뎅~ 뎅~ 거리는 범종소리로 세상에 알렸습니다.
참가한 모든 이들은 각자의 소망을 담아 뎅~ 뎅~ 거리는 범종소리로 세상에 알렸습니다.임윤수
새벽 4시! 밤샘기도에 이은 새벽기도들 마친 사람들이 삼배로 부처님과 스님들께 새해 세배를 올리고는 서로 합장 삼배의 예로 새해 인사를 건넵니다. 행복하십시오,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소원 성취하는 한 해가 되십시오!

행복수표 같은 세뱃돈을 받다

세배를 받으신 스님께서 빳빳한 신권으로 세뱃돈을 나눠 주십니다. 개개인이 받은 세뱃돈이야 액수로 치자면 별것 아니겠지만 받는 이보다 더 기쁜 표정, 더 커다란 웃음소리와 함께 나눠 주시는 세뱃돈에서 돈 가치 이상의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단순한 돈이 아니라 행복을 담보해 줄 행복수표 같은 느낌입니다.

세배를 마치고 두 시간 가까이 휴식을 취한 사람들은 새해 첫날을 밝혀줄 해돋이를 마중하기 위해 주섬주섬 옷들을 챙겨 입었습니다.

1시간 남짓 헉헉거리는 발걸음 끝에 만뢰산 정상에 올라섭니다. 동녘 하늘, 붉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동녘 하늘에서 불덩이 같은 새해 첫해가 솟았습니다. 심장 소리라도 울릴 것 같이 붉은빛으로 솟아오른 새해 첫날의 일출은 공중에 매달린 연등 모양으로 구름 낀 하늘에 떠올랐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전등불을 밝혀 행복하게만 보였던 가족 모습은 햇빛 아래서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전등불을 밝혀 행복하게만 보였던 가족 모습은 햇빛 아래서도 행복해 보였습니다.임윤수
해맞이를 끝낸 사람들은 평온한 발걸음으로 하산을 시작합니다. 무리무리 또는 개개인이 가는 방향과 발걸음은 달랐지만 모든 이들의 표정엔 쑥스러움처럼 보일 듯 말 듯한 행복이란 무형적 단어가 밑그림으로 그려져 송골송골 배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과 그날 아침의 시간, 가는 세월을 정중히 배웅하고 오는 새해를 기쁘게 마중하던 그 사람들은 그날 밤의 환희와 그날 아침의 희열감만을 기억하면 언제 어디서든 배시시 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겁니다.

연출로는 그려낼 수 없는, 가슴이 벅찰 만큼 커다랗게 공유할 수 있었던 송구영신의 찰나였으며 행복으로 점철될 연시(年始)의 출발점이었으니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시무식을 마친 모든 직장인들이 새해 업무를 시작 할 시간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덧붙이는 글 시무식을 마친 모든 직장인들이 새해 업무를 시작 할 시간입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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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좋아하는 거 다 좋아하는 두 딸 아빠. 살아 가는 날 만큼 살아 갈 날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는 자각하고 있는 사람.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是'란 말을 자주 중얼 거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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