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11월 24일자 한 일간지 1면. LG카드 사태로 1400만명이 이른바 돌려막기에 나서며 신용대란이 우려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3년여가 지났을 뿐인데도 카드업계는 당시 카드대란의 원인이 됐던 '묻지마 카드 발급'에 사활을 걸고 있어 제 2의 카드 대란이 우려되고 있다.윤태
# 1. "일정한 수입 없어도 발급해 드려요."
서울 이문동 한국외국어대 앞 국민은행 지점을 찾은 대학생 H(21)씨는 은행 창구 직원의 카드 발급 권유에 당황스러웠다.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대학생인데 발급이 가능하냐'는 질문에 창구 직원은 H씨에게 "현재 수입이 있느냐'고 되물었다. H씨가 과외 수입으로 월 30만원 정도를 받고 있다고 대답하자 직원은 "카드발급이 가능하다"며 가입 신청서를 내밀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H씨는 한도 150만원의 신용카드를 발급 받았다.
# 2. "현금인출 한도 상향하시겠나요?"
경기 과천에 살고 있는 회사원 P(32)씨는 최근 우리은행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P씨님! 우리카드 현금 한도 250만원 상향 가능, 통화를 누르십시오' P씨가 무심결에 통화 버튼을 눌렀더니 '이용 한도 즉시 상향 서비스'로 연결됐다. 이용 대금 결제능력, 소득 및 재산 확인 없이 손쉽게 이용 한도를 늘린 셈이다.
# 3. "카드 발급받으면 1만원 드릴게요."
회사원 L(29)씨는 최근 사무실에서 카드 발급 권유를 받고 깜짝 놀랐다. 자신을 LG카드 신입사원이라고 밝힌 한 카드 모집인이 카드를 만들면 1만원을 주겠다고 한 것. L씨는 연회비도 없고 가입만 하면 돈을 준다는 말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지만, 왠지 꺼림직 한 마음에 카드를 발급받지 않았다. 이 같은 현금 마케팅은 과거 '카드대란' 이전에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발급 때 사용된 것으로 엄연히 법적으로 위반이다.
이는 지난 2003년 카드사들의 과도한 외형 경쟁으로 '카드대란'이 일어났을 당시의 모습이 아니다. 지난해부터 겨우 '카드대란' 때 발생한 누적적자를 해소하고 막 '대란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카드 업계에 다시금 카드 발급경쟁이 도졌다.
"이대로 가다간 모두 공멸하고 만다"
@BRI@최근 한 전업계 카드사 임원은 사석에서 "이대로 가다간 모두 공멸하고 만다"고 푸념하듯 말했다. 사실 요즘 국내 카드업계는 겉으로만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지난해 11월 말 신용카드 판매액은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또 작년 한 해 카드사 당기 순이익만 사상 최대인 2조원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쯤이면 2003년 '카드대란' 이후 줄곧 따라다닌 '경제 파탄의 주범'이란 꼬리표도 훌훌 털어버릴 만 하다.
그런데도 시중 카드사 임원이 "모두 공멸하고 말지 모른다"고 푸념하니 이는 무슨 뜻일까. 지난해 하반기부터 두둑한 '실탄'을 무기로 카드사들의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면서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정이 녹록치 않다는 것이다. 특히 자금력이 넉넉한 은행계 카드사들이 과열경쟁에 앞장서면서 전업계 카드사들도 시장 수성을 위해 마케팅 대전에 뛰어들고 있다. 벌써부터 일각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제 2의 카드대란 위기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최근 카드 시장의 마케팅 과열 양상은 과거 '카드대란'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른바 닷컴경제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다급해진 정부가 급하게 꺼내든 카드가 내수부양책이었다. 이 바람을 타고 국내 카드사들은 건국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그 후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상황은 급반전됐지만, 당시 호황을 곧 이어 들이닥칠 '대란의 전주곡'으로 이해한 이는 거의 없었다.
당시 지하철역 주변은 카드사들의 거리판매대로 북적였고,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대학생들도 막 카드사에 취직한 선배의 '도움'으로 신용카드 하나쯤은 소지했다. 넘쳐나는 카드 모집인들이 '수시로' 일터를 찾아와,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길거리 모집 등 또 도진 카드발급 경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