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신 아버지 부디 영면하소서

등록 2007.01.12 21:26수정 2007.01.1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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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딱!" 흰눈을 그득 지고있던 소나무 가지가 부러져 내리며 뒷산을 울린다.


나는 아직도 거리에서 눈을 만나면 그때를 떠올린다. 중학2년 시절에 아버지와 콩을 꺾어 가리를 만들고 있었고 아직 가을이 한창 이였는데 그 해 첫눈이 함박눈으로 내렸다.

@BRI@아버지는 "허허" 웃더니 새참으로 가지고온 막걸리 한 사발을 그득 따라서 나에게 건넸다.

"쭉 마셔라, 괜찮다!" 나는 자랑하듯 벌컥벌컥 한 사발을 다 마시고 '씩' 웃었다. 아버지는 대견하단 듯 나의 입가를 거친 손길로 쓱 닦아주며 "음, 우리아들 다 컸구나, 잘했다"고 말했다.

그 소리는 지금껏 들어본 중에 제일 그립고 다정한 소리였다. 그 날 우리는 콩 단을 깔고 나란히 앉아 아주 오랫동안 함박눈을 맞았었다.

아버지는 강원도 영월에서 팔순까지 사셨고 나는 그분의 마지막 아들이다. 아버지는 참 대단한 분이셨다. 장장 16명의 2세를 생산하셨다. 나를 마지막으로 엄마가 임신했을 때, 공교롭게도 시집간 큰딸과 거의 동시에 아이를 낳을 판이었다.

두 모녀가 한마을에서 각각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물동이를 이고 지고 활보하고 다녔다. 엄마 입장에서 그 상황이 얼마나 민망했을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엄마는 독한 맘을 품고 조선간장을 바가지로 원샷 하거나 디딜방아에 배를 찧었다.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 졌을 때 엄마는 논두렁에서 배를 한껏 내밀고 공중을 날았다. "그때, 일초만 늦었어도 너는 지금 없었어" 엄마는 가끔 그렇게 말했다. 나를 살린 건 아버지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단 한순간도 진심으로 슬퍼하는 광경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하루에 꼭 소주를 세 병 마셨다. 다른 술은 일체 입에도 안대고 꼭 소주만 마셨다. 가끔 정종이나 양주 같은 게 들어오면 싸들고 가서 반드시 소주로 바꿔오셨다.


아버지는 항상 웃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불편한 얘길랑은 아예 접수를 안했다. 작년에 농협에서 빚낸다고 보증을 좀 서 달라 했더니 "내가, 미쳤냐?"고 했다.

얼마 전에 나는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땅을 다시 아버지에게 팔아먹었다. 계약서를 쓰고 보증인 세우고 각서까지 써서 법무사에 들고 갔더니 그 양반이 나를 아주 미친
놈 보듯 했다.

집에서 형님내외, 조카 두 놈과 같이 밥을 먹는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니는 거시기가 없냐? 왜 장가를 못 가나?" 이 글에단 '거시기'라 쓰지만 아버지는 국어사전의 그 발음대로 고함을 쳤다.

"야! 마누라 감으로는 다방레지가 최고다."
"왜요?"
"외교가 좋잖아, 임마"

나는 지금도 그게 무슨 뜻 이였던지 알 듯 말듯하다. 시골의 농협조합장을 했던 장남은 손님이 와도 다방을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터주대감으로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장날엔 형수가 시장엘 못 갔다. 세 병쯤을 드신 시아버지가 과부할머니 서너 명과 어울려서 어깨동무를 하고 휘젓고 댕기는데 어찌 장엘 가겠나.

올 봄엔 동네 면장이 기겁을 하고 나자빠졌다. 높은 양반이 방문해서 한참 브리핑을 하는데 아버지가 박차고 들어갔다.

"야, 이 놈들아! 장날이면 늙은이들한테 커피도 사고 해야지, 이게 뭔 짓거리야!"고 했다는 것이다.

서울 딸네 집에 갔다가 아마 구제 의류 행사장엘 들리신 모양이다. 바지가 1000원, 티셔츠가 500원, 잠바가 2000원 하더란다. 후로는 누가 옷을 사다 바치면 "이거 1000원주고 샀냐? 그럼 2000원 줬냐?고 물었다. 최근엔 누구도 옷을 사다 바치는 일이 없었다.

가장 최근에 들은 얘기는, 이웃집에 놀러 가셨다가 그 집 강아지가 맘에 들었었나 보다. 2만원에 사기로 하고 계약금조로 5000원을 주고 오셨단다. 그런데 그 집에서 3만원에 그 강아지를 딴 사람한테 팔아먹었다. 아주 난리가 났다. 스스로 계약위반 고발장을 작성해서 손자를 앞세우고 쳐들어갔다.

그 집 앞에서 손자는 큰 소리로 고발장을 낭독해야 했다. 가끔 집에 자식들이 종합적으로 집합을 하면 반드시 연설을 하셨다.

"작년 설에 누가 10만원 주고 가고, 누구는 5만원, 누구는 삼만 원…."

딸네는 가끔 그 일로 울기도 했다. 그땐 동네 경로당에서 회장 선거가 있었고, 아버지는 전혀 승산 없는 출사표를 던졌다.

"아버지, 몇 표나 받았습니까?"고 내가 꼬치꼬치 물었다. 열 몇 표라고 꼬리를 흐리시는걸 보고, 한 서 너 표 받으셨구나 짐작했다. 그 후로는 노인회장 모 씨 하고는 아주 원수가 됐다.

만나면 무조건 싸우셨는데 "뭐가 틀렸고, 뭘 잘못했고…."라며 재작년 설날 내 곁에서 밤새도록 웅변을 하셨다. 아침에 일어나니 내 귀와 골이 '멍' 했다.

아직 첫눈이 내리지 않았던 작년 10월 말, 극히 이례적으로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셨다. 방안에 누운 아버지는 "야들아, 내가 3~4일 안으로 죽을 터이니, 집 비우지 말거라"고 하셨다.

누구도 아버지 말을 곳이 듣지 않았다. 나는 적어도 아버지는 구십 세까지는 끄떡도 없을 거라 돌처럼 믿었다. 병세가 못 믿게도 악화됐고 지난해 11월 5일날 새벽 영월의료원에서 내 아버지 김홍기씨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아버지와) 빼다 박았다'는 말을 듣던 나는 장례식 3일 밤낮을 만취해서 보냈다.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렇게 절하는 나를 이해해 주리라. 참으로 어리석은 맘으로 나를 달랬다.

눈이 또 하얗게 하늘을 날고 내 얼굴을 덮는다. "평생을 유쾌하게 사셨던 내 아버지여, 부디 영면하소서!" 때늦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열여섯의 자식을 낳았던 내 아버지. 도무지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그 유쾌한 인생이 아버지 들에게 용기를 주고 자식들에겐 효의 마음을 일깨워 줬으면 합니다.

덧붙이는 글 열여섯의 자식을 낳았던 내 아버지. 도무지 예를 찾아 볼 수 없었던 그 유쾌한 인생이 아버지 들에게 용기를 주고 자식들에겐 효의 마음을 일깨워 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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