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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이익-----!
한 마리의 야조가 소리 없이 날아들 듯 날렵한 몸매의 흑영이 허공을 가르며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몸집이 작고 여린 듯 보여 여자인 듯 보였는데 얼굴까지 검은 복면을 쓰고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
흑영은 지면에 날아 내리더니 곧바로 한쪽을 향해 가볍게 예를 취하면서 다가갔다. 그쪽에는 백년이 더 되어 보이는 굵은 나무가 세 그루 품자(品字) 형으로 서 있었는데 그 사이로 확연히 파악하기 어려운 검은 형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BRI@"그들의 움직임은?"
그 어둠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주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는데 이상하게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른하게 만드는 묘한 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대적이라도 앞둔 듯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백호각에 침입한다면 빠져나오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날렵한 몸매의 흑영 역시 여자였다. 전음은 아니었지만 그녀들의 음성은 너무나 작아 두 사람 외에는 아무리 청력을 높여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예상했던 대로 혈간을 시해한 흉수가 이 운중보에 들어왔다는 의미겠지? 그 사실을 옥청량이 알았다는 것이고…, 하지만 과연 이 어둠이 걷히기 전에 그 자가 나타날까?"
나무 사이에 있던 검은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큰 키에 면사를 쓰고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선연한 몸매와 검은 천을 몸에 두른 모습이 바로 운중각에 스며들어 운중보주와 황용의 대화를 엿들었던 그 흑영이 분명했다.
"복(蝮)은 그곳에 남겨 놓았지?"
복(蝮)이란 살모사나 독사를 의미한다.
"아마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다면 즉각 보고가 될 것입니다."
면사를 쓴 여인이 고개를 끄떡이더니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뭔가 망설이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더 귀찮게 되었군…."
"무슨 말씀이온지…?"
"성가신 쥐새끼들이 냄새를 맡고 몰려드니 말이다…."
면사를 쓴 여인이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오른손을 뒤집자 반짝이는 미세한 물체가 쾌속하게 오른쪽으로 날았다.
슈우우----
그것은 투골침(透骨針) 같았는데 어둠 속이라 그 속도가 더욱 빠른 것 같았다. 그 순간 오른쪽 숲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이며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뒤집어 날아오는 비침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면사 쓴 여인이 다시 손을 쓰려 하자 사내가 몸을 다시 허공으로 띄우며 공중에서 회전했다.
"멈추시오…!"
누가 들을까 경계하는 나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사내는 가볍게 두어 바퀴를 더 돌고는 흑의 여인 앞으로 날아 내렸는데 그 몸놀림이 너무나 유연하고 부드러워 여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였다. 여인은 자신에게 날아온 사내를 향해 다시 한 번 손을 쓰려다가 누군지 알아보았는지 동작을 멈췄다.
"반교두(潘敎頭) 아니신가요."
약간은 실망스런,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뜻밖에도 나타난 사내는 운중보 교두 중 한 명인 환영교수(幻影巧手) 반일봉(潘馹鳳)이었다. 아마 경비인원이 부족해 교두와 문하생들의 도움을 받는다더니 그가 오늘 밤 경비를 서게 된 것일까? 그는 주위를 연방 조심스레 살피며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오늘 밤 경비가 삼엄하오. 되도록 움직임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앞으로 이삼일 역시 그럴 것 같소. 상대인께도 그렇게 전해주시오."
"이만 돌아가란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반드시 그런 뜻은 아니지만 되도록 그러는 것이 나을 것이란 말이오. 우리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는 말을 하다말고 시선을 돌려 주위를 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위험한 쥐새끼 몇 마리가 움직이고 있소."
"그렇지 않아도 돌아가기 전에 한 마리 잡으려던 참이었는데…."
여인은 의외로 반일봉이 시선을 돌렸던 곳을 힐끗 보고는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녀도 진작부터 자신을 따라다니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처리하겠소.'
전음이었다.
'혼자서 괜찮겠나요?'
반일봉의 얼굴에 하얀 선 하나가 그어졌다.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은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처리할 일이 아니오.'
'그럼 반교두를 믿고 돌아가야겠군요.'
그녀의 판단으로는 오늘 밤 자신을 따라다녔던 존재는 몸이 날랜 자가 아니었다. 진즉부터 처리하려다가 운중부 안에서 일을 만드는 것이 좋지 않으리란 판단에 미루고 있었던 터였다. 반일봉이라면 조용하게 처리할 것이다.
"그럼…."
여인은 시선을 돌려 주위를 한 번 더 훑은 다음 가볍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는 앞에 공손히 서 있는 여인에게 고개를 까딱하면서 몸을 날렸다. 그녀의 신형은 매우 유연하고 부드러워 느릿하게 신형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지만 금방 어둠 속으로 묻혔고, 또 한 여인 역시 금새 장내에서 사라졌다. 연무장 쪽으로 그녀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반일봉은 천천히 몸을 오른쪽으로 향하며 묵직한 목소리를 뱉었다.
"이제 볼 것 다 보았으면 나오는 것이 어떤가?"
그의 목소리에는 찐득한 살기가 묻어나왔다. 그러자 반일봉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옷을 터는 소리가 들렸는데 훌쩍 나무 위에서 한 인물이 떨어져 내렸다.
"아함…!"
나타난 인물은 천천히 반일봉 쪽으로 걸어오며 마치 지금 잠에서 깼다는 듯 길게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상만천에게 보이지 않는 야접(夜蝶) 한 마리와 사충(四虫)이 있다더니…, 야접은 꽤 큰 나비였네…. 몸매가 아주 죽여주던데 반교두와 그리 다정한 사이라니 부럽소. 쩝…."
상만천에게 일접사충(一蝶四虫)이라 불리는 은밀한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었다. 상만천에게 손발이 되고 눈과 귀가 되는 존재로 다섯 명 모두 은신술과 경신술에 유독 뛰어나 잠입과 암살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여자들이었다. 그 중 수뇌가 되는 여인이 바로 일접인 야접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운중보에 들어올 때 상만천의 면사를 쓰고 뒤를 따르던 바로 그 여자가 야접이었다.
"헌데… 오늘 밤은 왜 이리들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지 모르겠소. 야접이 운중각에 스며드는 바람에 잠이 깼지 뭐요. 그래서 뭐 하러 다니나 따라다녔더니 피곤도 하고…, 내가 코를 골았소? 도대체 마땅히 쉴 곳이 있어야지…."
"역시 네놈이었군."
나타난 인물은 뜻밖에도 운중보주의 셋째 제자인 와룡장(臥龍掌) 모가두(摸暇頭)였다. 운중각에 스며든 야접을 뒤쫓아 왔음을 인정하고 있는 터. 어눌하면서도 능글맞은 그의 말투는 반일봉의 비위를 긁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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