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대화' 포스터예술의전당
내가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앞을 자유롭게 볼 수 있다는 사실, 아니 다른 것은 다 떠나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우리는 ‘본다’라는 의미를 여타의 동사와 다르지 않은 ‘당연히 가능한 행위’ 중 하나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둠 속의 대화'(1.5-3.11,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는 그래서 당혹스럽다. 미스터리 영화나 호러 영화의 제목 같은 전시명에서 이번 전시가 어딘지 심상치 않을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전시공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어둠이 빼곡하게 들어찬 전시장에서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볼 수 없었다. 때문에 ‘어둠 속의 대화’는 전시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시작됐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최소한 스스로의 존재를 옆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먼저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가지를 준비해야 한다. 하얀 지팡이로 불리는 시각장애인용 지팡이 ‘케인’과 한 시간 정도 칠흑같은 어둠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그것이다. 케인은 손에 들었지만 미처 용기까지 준비하지 못했던 기자는 ‘과연 내가 이 어둠 속에서 60분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라는 공포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 뜨면서 허방을 손으로 더듬기를 반복했다.
@BRI@다행히도 전시장 안에서는 조를 이룬 관람객을 이끌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자리에 한참을 붙박인 듯 서 있다가 가이드의 목소리를 쫓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발짝 떼었을 때의 그 기분, 낭떨어지에 발을 내딛은 것 같은 그 기분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처음 손에 와 닿은 그 울퉁불퉁한 벽의 감촉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사람이 사용하는 오감에서 시각이 80%를 차지한다고 하니 언제 한번 그렇게 온 신경을 촉각에 혹은 청각에 곤두세워본 적이 있었겠는가. 만지고 또 만지고, 냄새까지 맡아본 후에야 그 울퉁불퉁한 것이 바로 대나무로 만든 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딱 그만큼씩 어둠에 익숙해졌다. 여전히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힘들었지만 손 끝에 스친 사물의 이름을 맞춰가는 것이 흥미로워지긴 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관람객들은 가이드와 혹은 옆에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 만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들리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바람이 어디에서 어느 방향으로 불고 있는지, 내 입 속으로 들어가는 음료가 어떤 독특한 맛을 지니고 있는지 등 그동안 정말 제대로 사용은 했던 것일까 싶은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사감을 곧추세우는 생경한 체험을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