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삶 통해 비춰본 비전향 장기수의 '일생'

[서평] 박소연의 소설 <눈부처>

등록 2007.02.01 10:12수정 2007.02.0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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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이 말을 들으면 언제나 야위고 쓸쓸한 노인네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첨예한 대치장이 되어버린 이 비극의 땅에서 '사상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던 외로운 사람들.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가 부각될 때면 인간의 고유한 생각을 통제하려 했던 체제의 야만성을 탓하기 보다는 장기수 개인의 '아집'에 초점을 두었다. 세월이 흘러 북한이라는 체제가 조금씩 앙상해지고 왜곡돼가기 시작하자, 그들은 섬이 되어버렸다. 어느쪽 땅에도 진정으로 속할 수 없는, 처음부터 오로지 감옥에만 속했던 것 같은 한 무리의 이방인들.


그들에 관한 뉴스를 접할 때마다, 언제나 그들 개개인의 삶만 생각했었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저항하게 했는가. 밖으로 나와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을 일주일만 체험한다면 사상 따위는 이제 북에도 남에도 없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을 텐데.

애초에 한국을 두 개로 갈라놓았던 것도 실은 '사상'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텐데. 어쩐지 과거의 한 시점에 못 박혀 전혀 앞으로 걸어가지 못하는 것 같은 그들이 안쓰러웠다. 체제가 야만적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보다는 그들 개개인의 삶을 감옥 밖으로 꺼내오고 싶은 마음이 훨씬 강했다.

비전향 장기수의 가족들에게 할당되었던 고통

박소연<눈부처>
박소연<눈부처>실천문학사
그리고 그랬던 마음이, 박소연 <눈부처>란 책을 읽으면서 여지없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살아서 길을 찾아보겠다고 내심 자위하며 전향서를 썼고 추방당해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전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 전역에 퍼져 있던 전향자 감시기구는 그에게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수없이 전향의 검증을 요구했다. 언제라도 다시 가두겠다는 예방구금령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욕된 짓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전향한 것을 후회했지만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 시절 한 번 전향했다가 두고두고 굴욕감을 느꼈던 그는 해방 후 같은 상황에 처하자 다시는 전향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전향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면서 더욱 목을 죄어오는 비열한 장치임을 실감한 것이다. 장기수들이 바깥 사정을 몰라서, 너무 이상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서 전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야만적인 체제가 오히려 그들에게 비전향을 사수하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나를 숙연하게 했던 것은 그의 가족들, 비전향 장기수의 가족들에게 할당되었던 고통이었다.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 동안 우리 가족이 어떻게 산 줄 아십니까? 아버지가 전향서를 쓰지 않은 대가로 그 수모와 치욕을 우리 세 사람이 밖에서 감당했습니다. 아버지 때문에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딸의 삶 되돌리려는 아버지 모습에서 느껴지는 안타까움

주인공이 옥에서 나왔을 때 그의 노모와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오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가족들은 사회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에 열 번도 더 이사를 다녀야 했고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구더기처럼 피해갔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가혹했던 것은 아무리 강한 정신력으로도 헤쳐 나가지 못할 무서운 마수, 가난이었다. 사회로부터의 고립은 필연적으로 가난을 낳았고 가난은 병마를 낳았다. 병에 걸린 어머니와 정신병에 걸린 오빠를 부양하기 위해 여동생은 결국 창녀가 되어버렸고, 아버지가 출소했을 때는 이미 중증 알코올홀릭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와 딸이 서로 마주선다. 함께 살 집에 옷가지와 양말까지 챙겨놓은 자상한 딸과 재회하는 아버지. 그러나 거친 세월동안 있었던 고통과 비밀들은 그들 사이에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어 그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단숨에 화해하기엔, 그들이 떨어져서 각자 겪어냈던 삶의 치욕이 너무나 깊고 집요했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출소 이후의 삶을 딸에게 바친다. 그리고 딸의 상처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갈수록, 그 상처가 모두 자신이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딸을 보듬으려 하는 아버지. 그러나 아무리 돌아가려 해도 이미 수렁에 너무 깊이 빠져버린 딸.

아버지 대신 가족을 부양하며 한없이 추락해버린 딸과, 피폐해져버린 딸의 삶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독자를 안타까움에 절게 한다. 그리고 비극적인 결말로 막을 내리는 것을 보면서 그제야 표지에 써 있는 제목을 응시하게 된다. 눈부처.

아아, 얼마나 알맞은 제목인가. 비전향 장기수라는 이름으로 긴긴 삶을 견뎌낸 아버지와 일생을 밑바닥을 전전하며 살아야했던 딸이 서로의 생을 마주보며 담아내는 모습. 이보다 더 잘 지어진 소설의 제목을 나는 알지 못한다.

눈부처

박소연 지음,
실천문학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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