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몰상식한 사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아닌 외부의 논리에 지배당하면서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못합니다. 종교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사회 전체에 억압과 배제의 논리가 극단적으로 들어서있기 때문에, 현재 제기되는 한국 종교의 억압과 배타성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지금까지 커다란 쟁점이 됐던 사상과 지역 차별 문제에 가려 그나마 덜 부각되었을 뿐입니다."
지난 6일 '종교 다양성을 통해 본 기독교 이해' 강좌에서 특강을 한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은 이찬수 교수의 부당해직을 통해 드러난 종교 사학의 억압과 차별·배제발생 원인을 이같이 지적했다.
합리적인 동물? 합리화하는 동물
@BRI@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홍세화 위원은 "인간이 '합리적 동물'이라면 오류가 드러났을 때 자신을 이성적으로 비판하고 수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며 "오히려 오류를 '합리화'시키는 동물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홍 위원은 인간을 합리적인 동물로 만드는 요소로 이성적 자기비판과 통찰의 과정인 '똘레랑스'를 제시했다. 그는 '똘레랑스'에 대해 "'관용'이 아니라 '용인'이며 더 정확히는 '화이부동'"이라고 말한다. '관용'이란 말엔 남이 저지른 잘못이나 실수를 용서한다는 자기 우월적인 의미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우월성을 찾으려 하고, 차별·억압·배제를 묵인하며 자신을 합리화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합리화의 근거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바로 '우성'과 '열성'이며, 이분법적 기준이다.
17세기의 인문학자 스피노자는 "사람은 한번 형성된 의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그 '고집'이 과연 자신이 의식적으로 접한 정보를 통해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인가 하는 점.
홍 위원은 "한국 사회에 팽배한 고집은 자신이 경험하거나 성찰하지도 않은 의식에 대한 고집일 뿐"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수많은 정보가 일상의 곳곳에 넘실대는 현대에는 주워들은 파편적인 정보와 허위정보를 지식으로 착각하는 '무지'가 넘쳐난다"고 말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의식'이 과연 어떤 식으로 형성된 것인지에 대한 무감각이다. "이런 의식 수준으로 '남과 다른 나'를 구분지으며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는 행태가 얼마나 저급한 것인지 깨달아야 한다”라는 홍 위원의 일갈은 이번 강의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정보가 넘실대는 현대의 '무지'함"
이같은 강의는 '똘레랑스' '자발적 복종' 등의 개념으로 한국사회의 문제를 일관되게 비판하던 것과도 다르지 않다. 또한 불상에 절을 한 이찬수 교수를 '우상숭배' '이단'이라며 쫓아낸 내몬 강남대나 보수교단, 또한 이 교수의 행동에 대해 무작정 비판만 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이기도 했다.
강의 중 홍 위원은 "프랑스에서는 '너 유태인이지' '너 노랑(황인종)이지'라는 말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언어로 규정돼 처벌을 받기도 한다"며 한국 사회에서 '너 전라도 사람이지'와 '너 경상도 사람이지'란 물음이 같은 의미인지 물었다.
단순히 출생지역을 묻는 질문임에도 여전히 같은 질문일 수 없는 한국 사회의 미숙함을 돌아보게 하는 물음이다. 이같은 표현들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전역을 헤집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은 한국의 근대화가 자기성찰과 반성을 통해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국가·민족·경제·사회, 인권 등 근대성을 나타내는 많은 말들이 대부분 외국에서 빌려온 개념이며, 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해 본 경험이 별로 없다.
지역·사상에 의한 차별은 물론, 종교·장애·성정체성·학력·출신지역 을 근거로 한 차별이 극명하게 존재하는 사회다. 한국사회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생략한 채 절차로서의 민주주의만을 수용해 이러한 안전장치를 만들지 못했다.
'똘레랑스'로 억압과 차별을 넘자
홍 위원은 이런 모순된 사회를 극복할 가장 중요한 기제로 '공공성'과 '똘레랑스'를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통해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것은 '공공성'이며, 이는 '똘레랑스'라는 타자 이해와 상호존중의 원칙이 지켜질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이 지켜질 때 다름은 더 이상 차별의 대상이 아니다.
"나와 타자와의 비교로 우월성을 유지하는 저급한 자기의식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는 성숙한 자기의식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홍 위원의 말은 이찬수 교수 문제를 비롯한 우리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하는 실천의식으로서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용석 인권연대 인턴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