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살배기 '솔우'는 할머니들의 천사

동네 할머니와 어린 아이의 실루엣

등록 2007.02.21 09:43수정 2007.02.2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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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우가 복수초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문득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깨닫게 된다.
솔우가 복수초를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문득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를 깨닫게 된다.최종수
고향을 떠난 삶은 고향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고향처럼 포근한 마을에 살고 있는 형님 댁을 방문했다. 호숫가 작은 마을에는 7가구가 고향을 지키며 옹기종기 모여 산다. 두 가구를 제외하고는 80세가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50대 후반 부부 외아들의 손녀가 겨울 동안 마을에서 살고 있다. 동네에서 유일한 어린아이이다. 이름처럼 예쁜 '솔우'가 외로운 어르신들을 싱글벙글 웃게 한다. 꽃보다 아름다운 웃음꽃을 피워내는 천사인 것이다.


봄날처럼 화창한 날씨가 부지런한 농부의 손길을 흙으로 불러낸다. 길가에 심어 놓은 복수초와 할미꽃 화단을 정리하는 친할머니 옆에서 장난감 쓰레받기와 쇠스랑을 들고 노는 손녀, 이제 꽃망울을 막 피워 올린 복수초 가족처럼 정겹다. 살가운 풍경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내 귀에 꽃망울처럼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어린 손녀 솔우가 허리가 굽은 할머니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호미처럼 굽은 허리 때문에 머리를 곧추세워야 하는 할머니, 세 살 먹은 아이가 할머니 품으로 달려들자, 지팡이를 땅에 팽개치고 어미 닭처럼 품어 버린다. 이처럼 설레는 풍경이 어디 있을까. 골이 깊은 얼굴에도 새순 같은 얼굴에도 환한 낮달이 떴다.

길가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일까? 할머니가 웃는가 하면 어린아이가 번갈아 웃기도 한다. 어느 결에는 화들짝 웃는 소리가 날아와 복수초 꽃잎에 노랗게 앉기도 한다. 신비경에 홀린 사람처럼 다가간 발걸음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아이와 할머니의 실루엣.

"할머니, 저기 꽃이 피었어요."
"뭔 꽃이 피었다고!"
"나 몰라!"
"몰라꽃이 피었다고!"
"까르르∼"(함께 웃는다)
"할머니, 그게 아니고. 꽃 이름 몰라!"


세 송이 복수초가 정답게 피어 있다. 갓 피어난 꽃과 활짝 핀 꽃이 솔우와 동네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
세 송이 복수초가 정답게 피어 있다. 갓 피어난 꽃과 활짝 핀 꽃이 솔우와 동네 할머니를 연상케 한다.최종수
동네 할머니와 동네 어린아이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꽃, 웃음꽃까지 활짝 피우면서 말이다.

"우리 동네 천사, 솔우 맘마 많이 먹었어."
"고기랑 먹었어. 할머니도 먹었어?"
"으응∼ 찬밥 물 말아서 때웠어!"
"할머니 국 말아먹어야지."
"솔우는 국 말아먹었어?"
"으응∼"
"그래서 우리 솔우 배가 통통하구나. 어디 배꼽 좀 보자!"
"싫어, 창피해∼"


솔우는 친할머니와 동네 할머니가 평소에 나누던 대화를 익히 알고 있었다. 솔우는 친할머니의 대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네 할머니와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3살배기 솔우, 사람이 그리운 동네 할머니의 지독한 외로움을 치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멀리서 넋을 잃고 손녀와 동네 할머니의 흐뭇한 풍경을 바라보던 친할머니가 손짓을 한다. 솔우와 동네 할머니는 관심밖이다. 손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 자리에 복수초 세 송이가 정겹게 앉아 있었다.

"이 세 송이 크기가 다르잖아요. 조금전 이야기를 나누던 풍경 같지 않아요?"
"나란히 앉아 있는 이 큰 꽃은 동네 할머니이고, 이 꽃은 솔우 것이고, 저 꽃은 제 꺼란 말이죠?"
"요즘 손녀를 키우면서 많이 배워요. 종종 손녀와 동네 마실을 나가요.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이 보이면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달려가는 거예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큰 소리로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르며 뛰어간다니까요. 그러니 동네 어르신들이 다 예뻐하죠."

할아버지도 뒤질세라 손녀 자랑을 거든다.

"저 할머니는 허리도 꾸부정하게 굽고 눈도 잘 안 보여요. 기력까지 없으시니까 빨래도 자주 못하시죠. 그래서 옷차림이나 모든 것이 형편없어요. 어린아이 눈으로 보면 무섭게 보일 만도 한데 할머니만 눈에 띄면 '할머니'하고 달려가는 거예요. 참, 신통해요."

자식과 손자 자랑은 팔불출이라 하지만 차이가 있다. 자식 자랑은 낯부끄러워서 하기 어렵지만 손자 자랑은 낯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내리 사랑이라 그런가 보다.

설이 지나 이제 네 살인 솔우는 길가에 앉아 동네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 중이다. 한 뿌리에서 나란히 한 가족으로 피어오르는 복수초 같다. 손잡고 땅 속에서 나오듯 사람도 어깨동무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행복은 복수초처럼 손잡고 피어서 함께 햇살을 받으며 바람에 도란거리는 풍경이라는 것을, 어른들이 잊어버린 것을 어린 솔우는 알고 있는 것일까. 길가에 나란히 앉아 복수초처럼 도란거리는 풍경을 축복하듯 햇살이 화창하게 쏟아진다.

지난해 11월에 친할머니와 동네 할머니를 방문한 솔우.
지난해 11월에 친할머니와 동네 할머니를 방문한 솔우.최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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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 기자는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일꾼으로, 불평등한 소파개정 국민행동 공동집행위원장으로 2000년 6월 20일 폭격중인 매향리 농섬에 태극기를 휘날린 투사 신부, 현재 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로 사목하고 있습니다. '첫눈 같은 당신'(빛두레) 시사 수필집을 출간했고, 최근 첫 시집 '지독한 갈증'(문학과경계사)을 출간했습니다. 홈피 http://www.sarang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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