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령·성춘향의 추억이 깃든 '광한루'

등록 2007.02.21 14:47수정 2007.02.2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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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작교에서 본 광한루
오작교에서 본 광한루이재은
지리산 북쪽 발치에 있는 전라북도 남원 광한루는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누각이라고 일컫는다.

이들 세 누각은 각각 대동강과 남강, 남천강 언덕에 위치한 데 반해 광한루는 남원 시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잦고 누각 주변에 축조한 우리 고유의 전통 정원 또한 유명하다.


측면 가까이에서 본 광한루-활주가 길게 서있다.
측면 가까이에서 본 광한루-활주가 길게 서있다.이재은
조선조 태종 말년이자 세종 원년인 1419년, 우리나라 대표적 청백리인 황희정승이 태종의 맏아들 양녕대군의 퇴출 불가를 고집하다가 태종의 미움을 사서 귀향을 간 곳이 바로 남원인데, 이 자리에 처음으로 누각을 지었다고 한다. 광통루라는 이름의 이 누각은 정유재란 때 1만이 넘는 남원시민의 전사와 함께 왜적들에게 불태워 없어졌고, 1626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됐다.

누마루 에서 본 익루- 정중앙이 방이다.
누마루 에서 본 익루- 정중앙이 방이다.이재은
광한루 오른쪽에 맞붙은 익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1795년에 건립되었다. 3면에 퇴청을 깔아 개방하였고 그 안쪽으로 정면 2칸, 측면 1칸의 구들방을 두었다. 마루 밑에는 아궁이, 굴뚝과 더불어 사방으로 쌓은 고막이 벽체를 형성하고 있다.

익루 밑의 아궁이
익루 밑의 아궁이이재은
또 고종 14년인 1877년에는 광한루 본관이 북쪽으로 점점 기울어졌고, 부사 이용준이 이를 고심하고 있었다. 이후 인근 고을 수지면에 사는 추대목이라는 목수가 기울어가는 쪽에다 누각을 오르는 계단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현관은 우연하게도 우리나라 누각에 건립된 최초의 현관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누각의 높이에 따라 오르내리는 사다리만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측면에서 본 완월정
측면에서 본 완월정이재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부터 18년 동안은 광한루가 수난의 시대를 맞게 되는데,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에 따라 누마루 위는 재판소로, 아래 부분은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때 재판소와 감옥을 만들었던 아픈 흔적이 지금껏 곳곳에 남아 있다.

정면에서 본 완월정
정면에서 본 완월정이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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