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과 상흔을 치료해 주는 안도현 노트에 담긴 시

[서평] 안도현 엮음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등록 2007.02.25 16:39수정 2007.02.2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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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안도현 시인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 시집 한 권을 출간했는데, 이번에는 안도현 자신의 것을 담은 시집이 아닌 다른 이의 시집을 출간했다. 이렇게 말하면 출판사를 설립한 것 같은데 그것은 안도현 시인의 동료, 선후배들의 시 48편을 수록한 책을 출간한 것이다.

왜, 자신도 시인이면서 다른 이의 시를 수록한 책을 낸 것일까? 그 답은 간단하다. 서면에서 '시를 읽는 독자들의 한 단계를 상승시켜 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 것처럼 안도현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 작품성 있는 시를 독자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과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반성을 이야기하는 좋은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거나 알쏭달쏭한 시가 아니다. 우리 일상의 언어들로 빚어낸 쉽고도 깊은 시들이기 때문이다. 설사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안도현 시인이 시마다 설명을 달아주는 세심한 배려를 한 덕택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 책은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다. 시인은 진짜로 다른 시인의 시를 읽으며 자신을 반성하면서 노트에 베낀단다. 그것이 지금의 결실을 보게 한 것인데, 시인은 시를 읽으면서 좋은 이유를 언급해 놓았다.

일상의 서정과 성찰, 반성의 시 세계를 단아하게 구축해 온 안도현 시인이 여러 동료 선후배 시인들의 시 48편을 골라 사진작가 김기찬씨의 사진들과 함께 책으로 펴냈다.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이가서)다.

"첫째 즐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이란, 시를 즐겁게 읽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시를 읽는 동안 저 자신의 정신과 상상력을 녹슬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신의 자극제로 시를 복용하면서 스스로 문학적 긴장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지요."
-서문 중에서


이렇듯 시인은 김종삼, 정호승부터 김사인, 김선우, 고재종, 오태환, 함민복, 강윤후, 황인숙 등의 비교적 덜 알려진 시를 포함해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책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이 책은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시인들의 모든 시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특히, 시를 읽어 내려가면서 문득 글이란 참 오묘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더욱이 김선우의 '봄날 오후'를 읽다보면 글이란 길게 쓴다 해서 좋은 글이 아니라, 일상의 쉬운 언어들로 하나의 풍경을 잘 그려내 독자들에게 느끼게 한다면 좋은 글이 아닐까 생각하게 했다.

늙은네만 모여 앉은 오후 세 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들/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려/ 클클, 머리를 매만져 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 , 그, 러, 바, 서,/ 가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디분을 꼭꼭 찍어 바른다/ 봄날 오후 세 시의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 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탑골 공원. 오갈 곳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휴식처이자 일명 박카스 아줌마가 드글거리는 곳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던 그곳. 김선우 시인은 그곳을 무심코 넘어가지 않고 자신이 관찰자가 되어 탑골 공원에 생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엄마를 생각한다. 으레 엄마는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림과 동시에 시를 통해 탑골 공원 공중 화장실의 생생한 풍경을 펼친다.

이러한 시들로 이 책은 가득하다. 첫째, 일상의 언어여서 쉽다. 둘째, 간단한 언어로 생생하게 그림을 그린 듯한 풍경을 펼친다. 이것이 시만이 가진 매력이 아닐까.

안도현 시인 자신도 이러한 매력을 아는지 48편의 시가 모두 그러하다. 그리고 이 책의 진짜 백미는 따로 있다. 오랜만에 만나 본 이 시집은 연애와 사랑 노름이 담긴 시집이 아니어서 좋다. 물론 연애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왜 연애 시는 과소평가를 받으며 작품성의 잣대에서 혹독한 비평을 받는 것일까, 하고.

하지만 넘쳐나는 연애시에 싫증이 났다. 이 무렵 다가온 이 시집은 반갑기 그지없다. 반가운 손님을 만나게 해준 이 책에 감사할 뿐이다. 이 책은 가령 일상의 반성 혹은 사회의 불온전한 모습까지도 담아냈기에 연애시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신선하게 다가온다.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이야기가 그러하다.

"아내가 장바닥에서 구해 온 부레옥잠 한 그루/ 마당의 키 낮은 항아리에 담겨 있다. 어제는 보랏빛 연한 꽃을 피우더니/ 오늘은 꽃대궁 깊게 숙이고 꽃잎 벌리고 있다/ 그것을 보며 이웃집 아낙, 꽃이 왜 저래? 하는 낯빛으로 담장에 기대섰을 때/ 저 부레옥잠은 꽃이 질 때 저렇게 고객 숙여요-, 하고 아내가 대답하자/ 밭을 매러 가던 그 아낙, 제 꽃 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구먼-, 한다/ 제 꽃지는 자리,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그 꽃/ 제 꽃 진 자리,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그 꽃/ 몸에 부레 같은 구근을 달고 있어,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리는/ 물 위를 떠다니며 뿌리를 내려,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는 것 같은/ 그 부레옥잠처럼/ 일생을 밭의 물 위를 떠 흐르며 살아온, 그 아낙/ 오늘은 그녀가 시인이다/ 몸에 슬픔으로 뭉친 구근을 매달고 있어, 남은 생/ 아무 고통도 없이 꽃을 피우고 싶은 그 마음이 더 고통인 것을 아는/ 저 소리 없는 낙화로, 살아온 날 수의 입힐 줄 아는……"

시에서 일생의 고단함과 그 고통을 이기고자 애를 쓰는 아낙의 삶을 노래한다. 이처럼 이 시집에는 바쁜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자칫 잊고 살아가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미학이 숨어있다. 그리고 그것이 추억이든, 상흔이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반성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거기에 이 시집은 안도현 자신이 시와 독자의 중간에 서서 다리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강윤후의 시 불록 혹은 부록의 시를 안도현 시인이 쉽게 풀어준다.

"시인은 시의 뒷부분에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준비해 두고 있다. '괜히 머뭇대는 바람처럼' 무엇에 좀 홀려 살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며 시 구절 하나하나를 풀이해줘 독자들이 자칫 무심코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을 짚어 낸다.

또 이 책은 김기찬 작가의 흑백 사진 수 집 점을 함께 곁들여 아득한 70, 80년대 풍경을 시와 함께 절묘한 조화로 만들어 내 우리의 향수를 자극한다. 예를 들어 어머니 치마 폭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는 모습, 일회용 대나무 우산을 팔러 나가는 소녀들, 동네 꼬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뻥튀기 아저씨를 구경하는 모습 등. 그것은 시에서도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시각으로 표현해 감동을 두 배로 만든다.

이렇게 안도현 시인이 낸 이 책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잊고 사는 것들, 혹은 추억을 되새기며 그리워하는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내 추억과 상흔 모두를 사랑하게 하는 힘이 있고 그 힘 속에 우리들이 있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의 부제도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라 붙인 것이라 생각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글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엮음, 김기찬 사진,
이가서,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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