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고 7년만 기다리시오

[태종 이방원 49] 하륜, 대학연의를 권하다

등록 2007.03.02 19:15수정 2007.03.0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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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화가 서순천의 작품 ‘눈 쌓인 마을’. 뒤에 보이는 것이 송악산이다.(밀알미술관 전시)
북한화가 서순천의 작품 ‘눈 쌓인 마을’. 뒤에 보이는 것이 송악산이다.(밀알미술관 전시)이정근
송악산이 개경의 표상이라면 용수산은 개경인들의 마음이다. 송악산이 우람한 아버지 같은 산이라면 용수산은 자상한 어머니 같은 산이다. 용수산 아래 추동골 99칸 대저택. 이방원의 집이다. 민제가 개경의 토호실력자들과의 통혼을 배제하고 함흥에서 온 변방의 젊은이를 사위로 맞이하는 데는 하륜의 천거도 유효했지만 그 나름의 혜안이 작용했다.

국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여진족과 왜구를 소탕하여 무공을 세운 아버지 이성계의 후광도 있었지만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출사한 이방원의 됨됨이가 사위로서 욕심이 났기 때문이다. 특히 방원의 눈에서 발하는 광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시니 고맙습니다."

99칸 대저택이 누추하다니 겸손이 너무 심하다. 방원은 장인 민제로부터 귀한 손님이 찾아갈 것이라는 전갈을 받았기 때문에 장인에 준하는 정중한 예우로 손님을 맞이했다. 방원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하륜을 맞았다.

대학, 중용, 맹자 등 고서적(국립중앙박물관)
대학, 중용, 맹자 등 고서적(국립중앙박물관)이정근
"무슨 책을 읽고 계십니까?"

사랑방을 들어서던 하륜은 방원이 읽고 있던 책표지에 큼지막하게 씌여진 책제목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내심 못 본 척 물었다.

"맹자를 읽고 있었습니다."


방원이 생모상을 당하여 시묘살이 할 때 지금 잘나가고 있는 정도전이 전해준 책이다. "덕을 잃은 군주는 신하가 폐하여도 된다"는 당시로는 발칙한 내용을 담고 있는 불순한 책이다. 방원은 정도전으로부터 이 책을 전해 받아 읽으며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됐고 역성혁명에 대한 생각을 굳히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책이다.

"아직도 이 책을 읽고 있습니까?"
"네."


"배를 탔으면 어디에서 내릴 것인지 목적지를 정해야지요. 종착지까지 갈 것인지? 중간에서 내려 배를 갈아 탈것인지 말입니다. 하하하."

호탕한 하륜의 웃음소리가 끊어지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상심이 크시지요?"

세상을 꿰뚫어 보고 있는 하륜은 방원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원 나이 비록 26세 젊은이이지만 임금의 아들 왕자다. 그릇이 크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하륜으로서는 아들 뻘이지만 공손히 대했다.

"이르다뿐이겠습니까."

장인 민제로부터 심중을 털어놓고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 인물이라는 소개를 받아서일까? 방원은 성격 그대로 직설적으로 속내를 털어놨다.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은 멈추어 서기도 합니다. 바람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바람이 없으면 날 수 없습니다. 구름에는 바람이 힘이지요. 7년만 기다리십시오."
"7년씩이나요?"

놀라운 예지력이다. 7년 후 이방원의 태종등극을 예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7년 후를 알 길이 없는 방원은 시큰둥한 냉소를 흘렸다. 방원에게 7년은 아득히 먼 미래다. 당장 오늘 내일이 문제였다. 생각하지도 않았던 배다른 막내 동생 방석이 세자의 자리에 있다니 방원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사랑방 풍경(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사랑방 풍경(국립중앙박물관)이정근
"지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는 구름은 죽을 고비를 넘기며 9년을 기다렸습니다. 그에 비하면 공(公)의 7년은 편안한 환경에서 2년이나 짧은 것이지요. 허허허."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다린 사람은 9년 전 함주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가 '조선건국사업'의 첫 삽을 뜬 정도전을 가리킨 것이다. 여기에서 하륜의 웃음 허허허는 허허허(虛虛虛)다.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이 땅의 기층민들이 목숨을 부지하며 참담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직접 체험하고 두 눈으로 확인한 정도전은 나주 유배가 풀리자 8년간의 유랑 끝에 함주 군막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이때가 9년 전이다. 살아 있는 소나무에 혁명결의를 새기며 오늘을 기다려 왔다.

정도전은 유배와 투옥 그리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기다린 보람일까? 한고조(漢高祖)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張子房) 한고조를 쓴 것 이서일까? 자신의 청사진대로 혁명을 성공시켰다. 회진현에서 가다듬은 민본사상을 펼치기 위하여 혁명공약 편민사목(便民事目)을 발표하고 평생의 신념인 재상이 중심이 되는 신권정치를 펼치기 위하여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돌아가리다. 시간이 되시면 이 책을 여러 번 읽어 두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륜이 돌아가면서 남기고간 책은 대학연의(大學衍義)였다. 대학연의는 고려의 제왕들이 탐독했던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뛰어넘는 책으로 송나라 시대 진덕수가 대학(大學)과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간추려 편찬한 책으로 성군(聖君) 세종대왕이 백번도 더 읽었다는 조선 최대의 제왕학(帝王學) 교과서다.

후대에는 목판으로 찍어 대량 보급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나 접할 수 없는 책이었고 천기를 누설하는 금기의 책이었다. 조선 조 과거시험의 강경과(講經科)의 하나였으며 출제와 채점의 기준이 되었다. 조선 초기 이후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에게 필수 과목이었다. 또한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한 간원(諫員)을 비롯한 신하들이 임금의 잘못을 공박하는 바탕이 대학연의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북한 화가들이 개성만을 소재로 한 그림 ‘개성, 어제와 오늘 전’은 서울 밀알미술관(02-3412-0061)에서 3월15일까지 전시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북한 화가들이 개성만을 소재로 한 그림 ‘개성, 어제와 오늘 전’은 서울 밀알미술관(02-3412-0061)에서 3월15일까지 전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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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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