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맘 때쯤 학생들의 전입학 등으로 분주한 교무실은 낯익은 '손님'들의 방문으로 더욱 북적이곤 합니다. 바로 시중 서점의 영업 사원들입니다.
보통 각 출판사마다 참고서와 문제집 '더미'를 명함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는데, 많게는 몇 십 권이나 돼 비좁은 교사용 사물함을 순식간에 가득 채워버립니다. 그 책을 이른바 '채택'하라고 주문하지도 않고, 그런 과정에서 촌지 따위가 오가지도 않으니, 학년 초만 되면 '공짜로 주니까 받는' 관행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형형색색의 참고서 묶음을 책상 위에 놓으면서 수령확인서에 서명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과목의 몇 권의 책을 받았는지 확인하는 단순한 절차에 불과했지만, 예전엔 없던 일이라 잠시 멈칫했습니다. 지금껏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이 책들을 단지 받는 것조차 혹 그릇된 행동은 아닐까 걱정이 스쳤습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만지작거리듯 책 한 권을 펴 보았습니다. 한 권 당 판매 가격이 1만원에서 1만5000원 정도였습니다. 현금이 아니라서 그렇지 적게 잡아도 해마다 이삼십만 원씩을 꾸준한 '소득'을 올린 셈입니다. 만만치 않은 책값을 보면 '학교에 등록금과 급식비 등을 내는 것보다 아이 참고서 사는 것이 훨씬 더 부담스럽다'는 학부모들의 하소연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신학기에 받는 참고서, 적게 잡아도 20~30만원
사실 해마다 '공짜' 참고서를 받아왔지만, 그 중 내용을 살펴본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사물함에 가지런히 꽂아둔 채 한 해를 넘기고 이내 폐지함으로 들어가기 일쑤입니다. 심지어는 묶음 끈조차 떼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학생이든 다른 교사든 누군가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꺼내 주는 '주인 없는' 책이기도 합니다.
정성껏 건네 준 참고서들의 이러한 수난(?)을 그 영업사원들이 짐작할 리 만무하지만, 이렇게 참고서를 거들떠 보지조차 않는 것은 초임 시절의 '살짝 두려웠던' 경험 때문입니다.
받게 되는 참고서는 겉표지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시중에서 학생들에게 판매되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겉표지에 '교사용', '연구용' 또는 '비매품'이라고 적혀있다는 것뿐입니다.
교과서와 함께 서로 대조해 가며 열심히 수업 준비를 했고, 판서를 하고 핵심을 요약, 정리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몇몇 참고서에서는 새롭고 괜찮다 싶은 문제는 한두 개 골라 지필시험에 출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교사로서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참고서 내용을 무단으로 사용하게 되면 저작권에 관한 법률 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서점 영업 사원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었습니다. 언뜻 들으면 너무도 당연한 얘기이며 두루뭉술한 지적이었지만, '공짜' 참고서를 아무런 죄의식 없이 활용하고 있던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곧장 저작권심의조정위원회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제 경우를 상담하였고, 다행히도 처벌을 받을 만큼 큰 문제는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인 유무죄를 떠나 교사로서 올바른 행동이었는지 반성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현재 중고등학생용 참고서는 시중 서점의 총 매출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넓게 봐서는 사교육 시장의 또 한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들어 신문이나 TV에 한두 꼭지 등장하긴 했지만, 지금껏 변변한 광고도 없이 사업이 유지되고, 외려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이유를 어쩌면 학년 초마다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교사용 참고서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얼마 전까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던 학교와 서점 간의 뒷돈 거래, 이른바 '채택료' 문제는 대부분 잦아들었지만, 교과목마다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여전히 참고서는 교과서에 버금가는 수업 교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는 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중학교와 심지어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의 책상 위에도 드물지 않게 꽂혀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예외 없이 고등학생용 참고서에는 '수능 완벽 대비'라는, 중학생용에는 '내신 만점을 위해'라는 글귀가 선명합니다. 마치 해당 참고서의 저자들이 수능 시험문제와 학교의 지필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사람인 양 되는 듯 자신감에 찬 표현입니다. 그 '장삿속 말장난'을 곧이곧대로 믿는 학생과 학부모는 없을 테지만, 업체의 허황된 자신감에 일면 수긍이 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저작권 침해 여부를 떠나 교사가 공짜로 받은 참고서를 수업시간과 시험에서 더 많이 '참고'하면 할수록 더 큰 광고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의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수업과 평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신문이나 TV 광고 등을 통하는 것보다 훨씬 큰 공신력을 얻을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거칠게 말해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교사는 해당 참고서의 판매를 돕는 광고 모델이 되는 셈이며 (참고서, 문제집 등의 구입을 사교육 시장의 범주에 넣는다면) 공교육이 사교육을 지원해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의도하지 않게 광고 모델 되는 셈
성적에 민감하고 영악한 학생들은 학년 초에 교무실에 살짝 들러서 교사들의 책상에 꽂힌 참고서를 유심히 살핀다고 합니다. 이런 집요한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교사들의 수업과 시험에 관련된 정보를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설 학원에서 인근 학교의 지필 시험문제 원안을 넘겨받아 학원생들에게 각 교사들의 출제 스타일을 분석해주는 것은 이미 오래된 학원의 기본 업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원에 다니는 현실 상 교사들의 '면면'이 만천하에 공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학년 초의 공짜 참고서들은 교사들의 수업의 질을 높여주는 도우미일 수도 있지만, 자칫 사교육을 부추기고 외려 자신의 수업 행위를 간섭하는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각 서점의 (교육자가 아닌 사업자로서) 영업 사원들이 해마다 학교를 찾아와 교사들을 격려해(?) 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 싶습니다.
교사들이 소신을 갖고 나름대로 수업을 설계해 추진하려는 독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참고서의 '달콤한 주술'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입시가 교육과정을 옥죄는 현실 상 입시에 가장 잘 부합하도록 변모하고 적응하는 참고서의 능력을 교사 개개인이 뛰어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는 의미입니다.
영업 사원으로부터 건네받은 참고서 '수령 확인서'에 서명하면서 마치 죄라도 지은 듯 하루 종일 속이 편치 않았습니다. 굳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교사든, 학생이든 직접 서점에 가 사면 될 것을, 어떻든 책 팔아 이윤을 남기려는 사업자들에게 '(이 책을 써서 학생들을) 잘 가르쳐달라'는 입발린 소리를 들어가며 참고서 묶음을 넙죽 받는 제 모습이 무척 어색했습니다. 마음 속이 꺼림칙한 것은 곧 양심에 찔린다는 것일 터, 내년부터는 아예 참고서를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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