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팔천 미터 상공에서 들려주는 진실

[서평]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고...

등록 2007.03.08 17:05수정 2007.03.08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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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가지

1996년 5월 10일,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거나, 밟지 못하고 그 언저리에서 머물던 등반대원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대참사의 표면적 원인은 기상악화로 인한 눈사태였지만 실제는 인간의 오만이었다.

로버트 마르코비치 감독의 <인투 씬 에어>(1997)로 영화화되기도 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선 소리 소문 없이 출판되었다 흔적을 감춰버린 안타까운 작품 <희박한 공기 속으로>.


지금은 절판이거나 품절, 서고에 구비 안 된 작품으로 구할 가능성마저 '희박한' 책이 되어버렸지만, 이 작품이 주는 감동과 충격은 어떡해서든 책을 구해보겠다고 마음먹게 할 정도로 놀랍고 경이롭다. 한 번 손에 잡으면 놓기 어려운, 가독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과연 해발 팔천 미터의 상공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해발 팔천 미터에 이르면 공기 중의 산소 농도가 평지의 3분의 1로 떨어진다. 이 '희박한 공기 속에서' 인간의 정신과 의지는 바닥을 드러내고 극한의 한계로 내몰린다. 죽음의 지대라 일컬어지는 그곳에선 더이상 이성적 판단은 제로가 되고, 통제되지 않는 공포만이 온몸을 휘감는다.

사고 당시 현장에서 참사를 목격했던 산악인 겸 작가 존 크라카우어는 그 고통의 순간을 회상하며, 그때 그곳에 어떤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는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아웃 사이더>의 기자였던 저자는 날로 상업화되어가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취재하러 1996년 4월 '어드벤처 컨설텐트'라는 등산대에 고객으로 참여한다. 당시 그의 취재 방향은 고객이 경비를 부담하고, 주최 측이 등반의 모든 행적, 기술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업 등반대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상업 등반대'란 고객이 루트 개척이나 짐 수송 같은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 몸을 추슬러 올라갈 능력만 있으면 등정할 수 있도록 모든 장비와 정보를 제공하는 일종의 여행가이드 같은 것이다.

@BRI@관건은 돈이다. 이미 에베레스트 캠프 곳곳엔 유명 거대 기업의 깃발이 펄럭였고, 등반대원 면면도 전문산악인들이 아니라 참가비를 지불할 수 있는 일반인들로 이루어졌다.


최고 수준의 가이드 등반대인 로브 홀의 '어드벤처 컨설턴트'와 스콧 피셔의 '마운틴 매드니스', 그리고 무수한 등반팀이 여신의 정수리를 밝기 위해 행군을 시작한다. 희박한 공기 속에서 인간의 몸은 고산병, 두통과 구토, 뇌수종과 폐수종으로 쓰러져갔다.

여신은 쉽게 대원들에게 진입장벽의 높이를 낮춰주지 않았다. 여신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이젠 더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상업등반대의 활약으로 정상을 밟는 일반인의 숫자는 날로 증가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거저 여신의 품에 안기려는 인간의 명예욕과 속셈을 알아차렸기 때문일까. 작은 우연들의 반복이 필연을 만들어가듯, 작은 실수들이 결국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것은 예고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정상을 밟기 위해 오른 등반대 중 12명이 폭풍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아주 순식간에 단 10분간의 간발의 차이로 생과 사는 갈라졌다. 저자는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뒤를 이은 등반대원은 얼음 폭풍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단 10분, 순간이었다. 한 발 옆에 선 동료가 얼음 폭풍에 밀려 낭떠러지로 쓸려 갔다. 운명을 결정지은 건 한 뼘의 거리였다.

이 책에서 놀라운 건,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단지 순수한 열정이나 자신의 극한적 의지에 대한 시험 혹은 인생에 대한 하나의 고찰로서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물론 개중엔 그런 순수함을 가진 이들도 있다.

불행하게 정상도 밟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더그 한센이란 사람은 우체국 직원이었다. 그는 야근뿐 아니라, 아르바이트까지 밤낮으로 뛰며 등반 비용을 모아 에베레스트 등정에 참여했다. 대령으로 퇴임한 후 삶의 목표를 잃고 무기력하게 살다가, 뒤늦게 등산을 통해 동지애와 삶의 활력, 목표에 대한 성취를 찾는 중년의 사내도 있었다. 그들은 산을 오름으로써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살아갈 목표와 확신을 얻어 돌아갔다.

하지만 유명세를 위한 수단, 혹은 하릴없는 백만장자의 독특한 취미 정도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 남편이 미국 MTV의 사장인 샌디 피트먼이라는 백만장자는 셰르파들에게 수십 킬로가 넘는 첨단 인터넷 장비와 프린터, 카메라, 미국에서 공수해온 호화로운 음식을 정상 근처까지 짊어지고 오르게 한다.

네팔 출신들의 세르파들은 목숨을 걸고 1천 내지 2천여 달러를 벌기 위해 고객들의 산소통과 텐트 등 중장비들을 짊어져야 하고, 그들이 매일 마실 물과 음식을 만들어주고, 산을 오를 밧줄을 매주고, 길을 터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인간 야크들인데, 이 생각 없는 여자는 고급 취미로 세르파들뿐 아니라 다른 등반가들에게 민폐를 끼친다. 결국 이 여자의 무신경함이 대참사를 부르는 데 중대한 원인을 제공한다.

최초로 에드몬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이후 하루가 다르게 에베레스트 등반은 하나의 상업코드로 변화했다. 네팔 정부는 등반 허가증을 한 팀당 5, 6만 달러, 그리고 초과 인원에 있어선 개인당 1만 달러씩 받아 챙겼다. 실로 엄청난 액수다.

산에 오르는 데도 계급과 부가 중요하게 됐다. 목숨을 지켜줄 첨단 장비와 가이드 등반대에 지불할 액수까지 생각한다면, 일반 서민들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기란 말 그대로 일장춘몽일 뿐이다. 여신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여부는 돈이다. 서민 수입으론 몇 년을 모아도 모으기 어려운 비용이 필요하다. 꿈으로만 가능한 등반일 뿐이다.

그러하다 보니, 스타벅스나 코닥(왜 이 기업들의 상표가 프린트된 깃발이 정상에서 펄럭여야 하는지는 좀 의문스럽다) 그 외에 유명 기업들의 후원을 업고 전문 등반가들은 하나의 상품으로 여신의 땅에 발을 들여놓는다. 이젠 그 기업들이 들어가지 못할 성역은 없는 듯하다.

캠프 주변엔 등반대원들이 버리고 간 오물과 쓰레기, 산소통으로 넘치고, 캠프 안에선 어떡하면 자신들의 대원들을 정상에 한 명이라도 더 올려놓느냐는 문제로 고심한다. 한 명의 숫자라도 더 올려놓아야 상업등반대는 유명세를 탈 것이고, 그만큼 수입을 창출할 수 있다. 그래서 상업등반대가 노리는 꼼수는 매스컴이다. 그들은 매스컴에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들이밀려고 애를 쓴다.

역시 에베레스트 등정의 상업화에 한몫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매스컴. 몇 번째로 몇 개의 최고봉을 동시에 정복했느냐가 그들의 최대 관심사다. 지구 최고봉의 정상이라는 결과만이 중요시되고, 상품으로써 가치가 있다. 상업등반대는 이런 매스컴과 더 높은 곳을 오르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등반이란 건 산에 오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시시각각 달라지는 날씨와 기상, 자기 자신도 통제하지 못하는 불확실함에 대한 도전과 극한의 한계를 극복하는 의지.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결국 인간은 여기서 벌어지는 온갖 악행들을 저 높은 곳까지 꾸역꾸역 지고 올라가 풀어놓는다. 바벨탑을 쌓아서 하늘에 닿으려던 인간의 저주가 에베레스트로 옮겨간 것이다. 어쩌겠는가. 산이 있어서 거기 오르겠다는 그 오만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바벨탑처럼 산이 무너지지 않는 한.

덧붙이는 글 |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 저자 존 크라카우어.

덧붙이는 글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 저자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

존 크라카우어 지음, 김훈 옮김,
황금가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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