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가 가까워 오는 8월 열 이튿날 밤. 휘영청 달은 밝은데 군막에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무학대사와 함께 식사를 마친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 들였다. 비좁은 좌중에 빙 둘러 앉았지만 누구 하나 입을 떼지 않았다. 천도는 모든 신하들에게 껄끄러운 문제였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 볼 뿐 말이 없었다. 적막을 깨고 태조 이성계가 입을 열었다.
"충의군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역성혁명에 참여하여 단성공신이 된 성석린을 이르는 말이다. 문신이었지만 승천부(昇天府)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원수로 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운, 무인을 아는 문인이다. 훗날 함흥에 칩거하던 이성계가 함흥차사(咸興差使)를 양산하고 있을 때 이성계를 설득하여 태종 이방원과 화합을 이루게 한 인물이다.
"이곳은 산과 물이 모여들고 조운(漕運)이 통할 수 있어 길지(吉地)라 할 수 있으나 명당이 좁으며 뒷산이 약하고 낮아서 도읍에 맞지 않습니다. 어찌 부소 명당이 왕씨만을 위하여 생겼고 뒷 임금의 도읍이 되지 않을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민력을 휴식하게 한 다음 두어 해 기다린 뒤에 의논하는 것도 늦지 않을까 합니다."
개경에 머물자는 얘기다. 성석린의 의견에 정당문학 정총이 가세하고 나섰다.
"도읍을 정하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운 일입니다. 천하의 큰 나라 중국도 관중(關中)이니 변량(汴梁)이니 금릉(金陵)이니 하는 두어 곳뿐인데 어찌 우리 작은 나라로서 여러 곳에 있겠습니까? 무악의 터는 명당이 좁고 뒷 주룡(主龍)이 낮으며 수구가 쌓이지 않았으니 좋지 않습니다. 길지(吉地)라면 어찌 옛사람이 쓰지 않았겠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하륜이 반박하고 나섰다.
"삼한시대부터 우리나라는 동쪽에 금강산, 서쪽에 묘향산, 남쪽에 지리산, 북쪽에 백두산, 중앙에 삼각산을 오악(五嶽)이라 하여 진산(鎭山)으로 숭상했습니다. 삼각산은 우리나라의 진산이자 남경(한양)의 진산입니다. 삼각산(三角山)이 가장 삼각산답게 보이는 곳이 무악 아래 한강변입니다. 무악에 도읍을 정하면 삼각산이 병풍처럼 북풍을 막아줄 것입니다."
새 도읍지를 논하는 이성계의 세 사람
@BRI@여기서 말하는 북풍은 중국의 바람이다. 하륜은 무악을 추천하기 위하여 사전 답사 나왔을 때 양화진에서 바라보았던 삼각산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윤곽이 뚜렷한 삼각(三角)은 신령스러웠다. 개경 송악산보다 격(格)이 있는 산세(山勢)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무악에서 뻗어 내린 능선이 금화산을 낳고 만리재를 넘어 용의 형상을 만들었으니 그 용이 입술을 한강에 대고 있는 모습은 천하의 명당이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 한강이 마르지 않는 한 왕조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오늘날 마포 도화동 뒷산이 용산(龍山)이다.
"우리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것은 계림(鷄林-경주)과 평양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의 터가 넓고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우리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전현(前賢)의 말씀에 의하여 만세의 터전을 세우려면 이보다 나은 곳이 없습니다."
하륜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중추원 학사 이직(李稷)이었다. 하지만 이직 역시 무악은 비좁다는 단서를 달았다.
"우리나라 비결에 이르기를 ‘삼각산 남쪽으로 하라’ 했고 ‘한강에 임하라’ 했으며 또 ‘무산(毋山)이라’ 했으니 이곳을 들어서 말한 것입니다. 터를 잡아서 도읍을 옮기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로서 한 두 사람의 소견으로 정할 것이 아니며 반드시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을 따른 뒤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악의 명당은 신도 역시 좁다고 생각합니다."
"왕사께서는 어디가 좋을 듯싶습니까?"
"제 소견으로는 인왕산이 좋을 듯싶습니다."
무악산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데 인왕산이 튀어나왔다. 새로운 후보지다. 무학대사 자초가 누구인가? 임금의 스승 왕사(王師)다. 경상도 합천 태생으로 18세에 출가하여 소지선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아 승려가 되어 임금의 스승이 된 고승이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조선에서 승려가 임금의 왕사노릇을 한다는 것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지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이성계가 청년 장교 시절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어느 집에 잠들어 있는데 집이 무너져 서까래 셋에 깔리는 꿈이었다. 기분이 나쁘고 이상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이성계는 안변 설봉산 아래에 토굴을 파고 도를 닦던 스님을 찾아갔다. 노승은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서까래 셋이 가슴에 왔으니 그것은 임금 王자를 가리키는 것이오. 나라의 왕이 될 운명이니 천기를 누설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시오."
정도전을 위협하는 하륜과 무학대사
그 스님이 무학대사다. 개경에서 무악으로 출발하기 전 양주 회암사로 사람을 보냈다. 새로운 도읍지로 무악산을 답사하니 고견을 듣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무학대사는 흔쾌히 응했다. 자초 무학은 비록 승려이지만 풍수지리와 도참설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정도전은 아연 긴장했다. 정통유학자로서 도참설을 신봉하는 하륜을 털어내는 것이 당면한 문제인데 임금의 왕사가 인왕산을 들고 나온 것이다. 도참과 불교가 협공을 하는 격이었다. 하륜은 무악을 주장하고 왕사는 인왕산을 들고 나오는 형국에서 정도전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다. 하지만 정도전은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귀재였다.
"봉화군(君)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봉화는 정도전의 본관이다. 봉화군(君)은 정도전을 이르는 말이다. 직책은 낮았지만 좌명공신 문하시랑찬성사 의흥친군위 절제사 봉화군(佐命功臣門下侍郞贊成事義興親軍衛節制使奉化君)을 받았기에 임금도 존중하여 부르는 것이다.
새로운 왕국의 밑그림에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도덕정치가 근간을 이루고 있는데 승려가 추천한 후보지가 새로운 도읍지가 된다는 것은 정도전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륜과 무학 두 사람을 일거에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하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도참설의 대가요 하나는 임금의 왕사가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 각개격파가 필요했다.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 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와 종사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에 머물러 있으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배운 바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조실록>
도참설을 음양술수로 몰아붙이며 공격의 칼끝이 도참설의 대가 하륜을 겨냥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면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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