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 2. 21. 중앙일보 좌 아래, 김구-삼의사묘 사이에 골프장공사로 나무와 잔디가 파헤쳐 있다. 나무가 군집한 곳이 삼의사묘 울타리다. 우 사진은 같은 일자 동아일보. 이인(전 법무장관) 서있는 사람이 9개 사회 종교단체 대표들과 골프장 반대 성명서 낭독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중앙-동아일보
1960년 6월 26일 효창묘역에서 김구 주석 서거 11년만에 제1회 추모식을 열게 된 것은 4.19 혁명 여파였다. 이날 폭우에도 5천명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김창숙은 추모사 중에 백범을 누가 죽였느냐고 반복하면서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동시에 부산구덕운동장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모식을 가졌다.
4.19 혁명으로 백범암살진상규명 기회가 발현되고, 훼손된 묘역 복원 기회가 마련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 정국은 모든 것을 무산시켰다. 이승만 정부시절 탄압 관성은 박정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박정희 정부 또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던 만주군맥 중심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묘소 이장을 통보하였는데 유족과 각계의 이장반대 청원 등으로 취소되었다. 이어 1966년 김구 주석묘 남서쪽 20m 거리에 대형 테니스장이 설치되어 2001년 백범기념관이 착공될 때까지 사용하였다.
1968년에는 김구 주석묘와 삼의사묘 사이에 5500평 골프장 설치를 위해 나무와 잔디를 파헤치는 철탑공사가 벌어졌다. 서울시의 골프장 허가 이유는 "골프장은 묘 울타리 밖이며, 연탄재가 쌓이고 하수가 흘러 잔디를 깔아 골프장으로 사용하면 미관상 좋다"고 하였다.
이에 1968년 2월 21일 선열묘소보존회(이인 회장) 등 9개 사회·종교단체는 "서울시는 '전국민의 숭앙과 얼의 상징'인 장소에 '특수층 오락시설인 골프장'을 설치하여 묘소 통로마저 침범하는 망국적 행위를 중지하고 원상복구"하라는 성명과 골프장이 철회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당시 김신조 1ㆍ21 사태 상황에서 선열묘소에 골프장 설치 보도가 나가자 서울시는 여론이 나쁘다는 이유로 공사를 취소하였다. 그리고 1969년 김구 주석묘 북쪽 35m 거리에 북한반공투사위령탑이 세워졌는데 이곳은 효창원묘역 정수리에 해당한다. 백범기념사업회는 재향군인회에서 협조공문이 왔을 때 합당치 않다며 반대했지만 무시되었다고 한다.
이 탑은 10월 19일 국군과 유엔군이 인민군을 평양에서 물리친 날을 기념해 세운 것으로 비석에는 대통령 박정희, 국무총리 정일권,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김성곤, 함창희, 정주영, 김홍일과 이북 8도 지사와 도민회장 등 이름이 새겨 있다.
효창원묘역은 친일반공세력에 시해된 김구 주석과 임시정부를 지켜낸 일곱 분 영혼이 잠든 곳이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이 머리 위에 반공탑을 세운 것은 임시정부를 발아래 두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이어 1969년 임정요인묘 북쪽 30m, 60m 거리에 어린이 놀이터와 원효대사동상이 세워졌고, 1972년 김구 주석묘 서쪽 30m, 60m 거리에 신광도서관(현 노인회서울시연합회)과 대한노인회중앙회 건물이 들어섰으며, 옆에는 회관 건립에 대한 육영수송덕비가 세워졌다. 6~7년 전에는 묘소 틈새 곳곳에 정자를 짓고, 삼의사묘 옆과 뒤에 30여 가지 운동시설을 설치하였다.
이토록 선열묘역을 파괴하고 탄압의 쇠말뚝(운동장)을 박은 이 대통령은 1956년 4월 국무회의에서 동작동묘지 완공을 계기로 현충일 제정과 대통령령으로 국립묘지법령을 승인하고, 독립운동 성지인 탑골공원에 자신의 동상을 세운 데 이어, 남산에 세계최대 81척 동상을 세우는 이율배반을 보였다.
역시 선열묘역 곳곳을 상처내고 쇠말뚝(건물ㆍ시설물)을 박은 박 대통령이 1960년대~70년대 초반에 걸쳐 김유신묘를 비롯해 현충사, 왕실묘역, 유관순유적지 등을 성역화ㆍ사적지화 하는 이율배반을 보였다.
따라서 현재 동작동현충원 상단에 안장된 두 전직 대통령은 효창원묘역을 이토록 탄압한 것에 대해 영혼으로나마 사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