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

[서평]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록 2007.03.16 16:45수정 2007.03.16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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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역사란 무엇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제목을 가진 책들을 보면 왠지 근사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처음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신뢰감이 느껴졌다.

알마출판사
그러나 막상 책을 읽어보니 내 기대나 예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당초엔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류의 역사학 입문서나 개론서일 거라 예상했는데 실제 내용은 에세이나 평론집에 더 가까웠다. 알고 보니 이 책의 원래 제목은 'Who Owns History'(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였다. 엄밀히 따지면 굳이 '역사란 무엇일까(What is History)'라고 번역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아마도 독자들에게 좀더 신뢰감을 주기 위해 이런 제목(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을 선택한 모양이다.


아무튼 제목만 보면 자칫 역사학 입문서나 개론서로 착각하기 쉽지만 정확히 말해서 이 책은 역사적 주제에 관한 에세이다. 그렇다고 역사학 입문서나 개론서가 아니라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 내용의 깊이나 폭은 웬만한 입문서나 개론서를 능가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의 저자 에릭 포너는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 단체의 수장을 모두 역임했을 만큼 뛰어난 역사학자다. 그럼에도 그는 "미국을 망치고 있는 1백인 가운데 75번째 인물", "단연 눈에 띄는 역사가이며 급진 분파 및 여론의 빨치산",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 "미국을 증오하는 지식인 가운데 하나" 등등의 수식어가 뒤따르는 특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반면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수식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시대에 단연 돋보이는 역사학자", "에릭 포너의 <미국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저술가"(칼 로브: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정치 고문).

이상을 종합해 보면 에릭 포너는 노암 촘스키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고, 기존 체제에 안주하기보다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그가 진짜로 "노골적인 소련 체제 옹호자"이거나 "미국을 증오"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어디까지나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보수진영 학자들의 평가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보수진영으로부터 이와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는 노암 촘스키도 "나는 결코 미국을 증오하지 않는다. 오히려 누구보다 미국을 사랑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에릭 포너 역시 미국인으로서 자국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생산적 비판을 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흔히 '역사란 무엇인가'와 관련해 등장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과연 역사는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는 일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일인가? 물론 역사를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것도 모두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과도한 역사적 해석이 현실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맺는 경우가 많아졌다. 지금도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두고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정반대로 해석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 미국과 중동,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친일파 청산 문제 등등이 그렇다.

그에 대해 에릭 포너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다행히도 이 책에서 그에 대한 대답으로 간주할 만한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역사는 항상 새로운 물음이나 새로운 정보, 새로운 접근 방법이 등장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정치·사회·문화적 과제가 제기될 때면 다시 쓰여왔고, 앞으로도 다시 쓰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마다 역사를 다시 쓸 수 있고, 또 다시 써야 한다고 해서 역사가 단순히 신화나 만들어낸 이야기를 시대별로 늘어놓은 것일 뿐이라는 뜻은 아니다. 제대로 된 역사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따위의 거짓말들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학문적 기준들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은 과학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합리적 근거를 갖춘, 과거의 근사치로서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직업 역사가가 아닌 사람들이 인정하기 어려운 진실은 과거의 사건을 전달하는 합리적인 방식이 반드시 하나만이 아닐 때가 많다는 점이다."

아주 중요한 얘기다. "제대로 된 역사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따위의 거짓말들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는 학문적 기준들". 만약 이런 학문적 기준들 없이 마구잡이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그야말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역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에릭 포너, 노암 촘스키 같은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보면 학문적 기준이나 객관적 사실들을 중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의 실정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객관적 기준보다 감정적 반응을 앞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학문적 기준이나 객관적 사실들이 존재해도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에릭 포너, 노암 촘스키 등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만약 에릭 포너가 학문적 기준을 담보하지 못했거나 노암 촘스키가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 채 맹목적인 정부 비판에 열을 올렸다면 그들의 주장엔 아무런 설득력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에릭 포너는 미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미국이란 나라가 당초 '자유'란 미명을 앞세워 원주민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세워진 위선적 '자유국가'라고 비난한다. 즉, '자유의 땅' 미국이 '자유로운 영토의 확산'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세력이 있다면 그것이 인디언이든 멕시코든 소련이든 이라크든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무차별적인 공세를 퍼붓는 미국의 이중성을 고발한 것이다.

그 외에도 미국에서 사회주의가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이유, 흑인이 소외된 채 백인들끼리의 화해로 끝난 남북전쟁, 그리고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에서 에릭 포너는 상대성으로 충만한 오늘날의 역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즉, 누가 역사를 쓰느냐, 누가 역사를 읽느냐에 따라 역사적 사실 자체가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그로 인해 오늘날 역사는 특정 국가, 계급, 인종, 지역의 소유물로 전락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원래 제목인 'Who Owns History'(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를 그대로 살리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앞으로 우리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묻는 대신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라고 질문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에릭 포너,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 박광식 옮김.
가격  12,000 원

덧붙이는 글 에릭 포너,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알마, 2006, 박광식 옮김.
가격  12,000 원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

에릭 포너 지음, 박광식 옮김,
알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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