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봄날엔 이런 길을 걷고 싶지 않으세요?

보물 제 209호 동춘당에서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까지

등록 2007.03.15 15:24수정 2007.03.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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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보물 제 209호 동춘당

보물 제 209호 동춘당 ⓒ 김유자

은진 송씨 집성촌인 송촌이 간직한 문화유적

동춘 송준길 선생의 고택과 별당인 동춘당이 자리한 곳은 원송촌이라 부르던 곳입니다. 대전 I,C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네지요. 조선시대 초에 쌍청당 송유가 이 지역에 둥지를 튼 이래 대대로 은진 송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므로 송촌이라 불렀습니다. 송촌도 윗송촌과 아래송촌으로 나누는데 동춘당 송준길이 살았던 윗송촌이 송촌의 중심이 된다 하여 원송촌이라 불렀다더군요.


원송촌에 있는 보물 제209호 동춘당은 송준길의 별당입니다. 본래 이 건물은 동춘당의 아버지인 송이창이 세웠는데 건물의 일부가 허물어지자 송준길이 건물의 위치를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했다고 합니다.

동춘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단아한 팔작지붕의 건축입니다. 무더운 여름날에 대청의 앞쪽과 우측 들어열개 분합문을 활짝 열고서 앉아 있노라면 정말 시원하기 그지 없습니다. 마당과 집이 하나로 동화되니 방안에 앉아 있어도 갑갑한 공간이 아니라 확트인 자연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동춘당의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6년 후 우암 송시열이 쓰셨다고 합니다. 동춘당이란 봄과 같으라는 뜻인데 아마도 항상 만물이 생동하는 봄처럼 살아라는 뜻이겠지요.

a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제 제3호 동춘고택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제 제3호 동춘고택 ⓒ 김유자


동춘당의 뒤로는 동춘 고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택의 맨 앞에는 사랑채가 있고 그 뒤에는 안채, 우측으로는 동춘 선생을 모신 별묘와 4대조의 신위를 모시는 가묘가 있습니다.

사랑채의 중문을 들어서면 옹색하지 않은 크기의 안마당이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내외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담이 처져 있습니다. 남자들의 안채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강한 폐쇄성을 보여주는 장치지요. 유교적인 질서가 공간의 질서로 표현된 거라고나 할까요. 이 격담의 사랑채 뒤안에 있는 태극 문양과 괘를 넣은 굴뚝이 꽤나 인상적입니다.


동춘당과 고택은 집주인인 동춘 선생의 성격을 말해주듯 단아하며 품위가 있습니다. 안마당 가진 공간적 여유, 고택에서 멀찍이 떨어진 별당의 배치 등 기호지방 양반집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a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송용억 가옥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송용억 가옥 ⓒ 김유자


동춘 고택에서 오른쪽으로 몇 걸음 걸어가면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인 송용억 가옥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춘당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한 이래 그의 11대 손까지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유서깊은 건물이지요


가옥은 폐쇄적인 영남지방의 건축과는 달리 개방적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소대헌과 오숙재라 부르는 두 사랑채는 가로로 병렬 배치되어 더욱 큰 개방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안채인 호연재의 뒷편에는 정면 두칸, 측면 두칸으로 된 사당이 있고 집 밖으로나오면 동쪽 담 옆에 몇 백년 된 느티나무가 있고 연못가에 서 있습니다.

이 집의 오래된 고목인 영산홍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답니다. 영산홍이 한창 자지러지게 피어날 때면 각지에서 몰려온 사진 작가들이 사진을 찍느라 야단입니다.

a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 33호 비래동 고인돌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 33호 비래동 고인돌 ⓒ 김유자


송용억 가옥을 나와서 오른쪽 언덕 위 도로로 올라서서 뒷산 쪽을 바라보고 걷다보면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그 밑으로 난 굴다리를 지나자마자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길손을 맞이합니다.

느티나무에서 고개를 돌려 왼쪽 논가운데를 바라보면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33호인 비래동 고인돌 2기가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반겨줍니다. 여간한 눈썰미가 아니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랍니다.

1호 고인돌은 예전에 상석의 반이 마치 입석처럼 세워져 있는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때 동네 주민들이 논가에 위치한 고인돌의 상석을 쪼개어 세우고나서 그 표면에다 새마을 상징 마크를 그려 넣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합니다.

이 비래동 고인돌에서는 금강 유역에서는 최초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그때 함께 출토된 석촉 등의 형식으로 보아 고인돌이 조성된 시기는 B.C 7~B.C 6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곳의 고인돌 2기와 마을 안 개인집 마당에 있는 2기, 그리고 고속도로 너머에 있는 1기 등 마을 인근에는 모두 5기의 고인돌 군을 이루고 있습니다.

고성이씨 집성촌인 비래골의 곡절어린 역사

a 고성이씨 집성촌인 비래골

고성이씨 집성촌인 비래골 ⓒ 김유자


a 비래골 감실. 동그라미 쳐진 곳이 감실이 있는 곳입니다.

비래골 감실. 동그라미 쳐진 곳이 감실이 있는 곳입니다. ⓒ 김유자


들머리에 몇 백년 된 두 그루 느티나무가 지키고 있는 비래골은 500년을 이어 내려온 고성이씨들의 집성촌입니다. 현재 47가구가 살고 있는데 타 성씨는 서너 집밖에 안 될 만큼 단일 성씨로서의 순수성을 자랑(?)하고 있는 마을이랍니다.

연산군 때 일가 사람 중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된 사람이 생기자 후환을 두려워한 나머지 고성이씨 일가친척들은 저마다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때 이계종이란 분이 이곳에 처음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을 일으키자 반역의 가문이 된 고성 이씨는 다시 한 번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 동네 뒷산 맨 꼭데기집 뒤 바위에 파놓은 감실은 고성이씨의 고난에 찬 삶의 내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감실에는 석문도 있는데 난리가 날 때마다 이곳에다 감쪽같이 족보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갑오농민전쟁 때에도 여기에다 족보를 숨기고 피난을 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고난이 마을 사람들을 더욱 굳게 결속시켜 오래동안 동족마을을 지켜온 힘이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일부 주민들은 이곳을 신령스런 바위로만 여기고 치성을 드리기도 한답니다.

a 동춘선생의 친필 금석문 '초연물외'

동춘선생의 친필 금석문 '초연물외' ⓒ 김유자


마을을 지나서 비래사로 향한 오르막길을 오르면 비래사 직전에'초연물외'라고 금석문이 새겨진 바위가 보입니다. '초연물외'란 아마도 물질에 초연하라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이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의 친필이라고 하는데 이밖에도 동춘 선생은 돈암서원묘정비, 숭현서원비, 박팽년유허비 등 많은 글씨를 남겼답니다.

a 요사채 문 위에 있는 옛 비래암 현판

요사채 문 위에 있는 옛 비래암 현판 ⓒ 김유자


암각된 바위를 지나서 계곡을 건느면 바로 옥류각과 비래사가 나옵니다. 비래사는 지금은 사찰이 되어 있지만 원래는 송촌의 은진송씨 문중에서 자제들의 강학처로 사용키 위해 만든 장소였답니다. 그러나 승려로 하여금 이곳에 상주하면서 지키게 하였던 까닭에 세월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사찰로 변하게 된 것이지요.

비래암은 근래에 대웅전과 삼성각을 짓고 비래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중찰불사를 하는 바람에 예전의 고즈넉한 산사의 운치는 깨졌습니다. 끊임없는 공사로 주변이 늘 산만하기도합니다. 옛날을 증명해주는 건 오로지 빛바랜 현판과 명문 뿐인 듯 합니다.

a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옥류각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7호 옥류각 ⓒ 김유자


비래사 입구에 선 2층 누각 옥류각 또한 동춘당 송준길이 인조 17년(1639)에 지은 강학처랍니다.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을 비롯한 이 지역의 여러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강론하던 유서깊은 곳이지요.

높이가 다른 여러 가지 모양의 주초석을 유수암반 전후 좌우에 놓고 그 위에 루각을 세웠습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을 누각 아래로 흘러 보내도록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중층식 건물이 되고 출입도 정면 아닌 측면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옥류각에서 조금 더 오르면 약수터가 나오고 조금 더 오르면 절고개에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길이 몇 갈래로 갈라집니다. 계족산 정상인 봉황정으로 갈 수도 있고 성재산 줄기를 따라서 계족산성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그렇지 않으면 오른쪽으로 계속 이어진 능선을 따라서 질현산성을 거쳐서 우암사적공원까지 가도 됩니다.

a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 남문지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 남문지 ⓒ 김유자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즐겨 택하는 코스는 아무래도 계족산성 방향일 것입니다. 남문지를 통해서 산성으로 올라갑니다. 남문지에서 약 7m 가량 북쪽에 있는 봉우리에는 봉수대 터가 있습니다. 성내에서 가장 낮은 동벽 근처에선 2개소의 우물지와 저수지도 있지요.

계족산성은 백제부흥군의 요충지인 옹산성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당시 백제부흥군의 요충지인 옹산성과 우술성을 함락시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옹산성을 포위한 김유신 장군은 성을 함락하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항복하여 목숨을 보전하고 부귀를 기약하라"고 했지만 백제 부흥군은 "싸우다 죽을지언정 신라군에게는 항복하지 않겠다"고 하며 결사항전하다 사살 당한 수천 명의 백제 민초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사적지입니다.

역사의 향기를 맡으며 산책을 즐길 수 있는 코스

성에 올라 바라보면 동쪽으로는 대청호 건너편으로 충북 옥천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충북 청원군 문의면이 보입니다. 어쩌면 이 시원한 눈맛 때문에 이곳에 자꾸 들르게 되는지 모릅니다.

화창한 봄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그러나 아주 잠깐 밖에 시간이 나지 않을 때, 전 동춘당에서 계족산성까지 4km 남짓 되는 이 길을 걷곤 합니다. 옥류각을 지나서 계족산성까지는 산길이긴 하지만 그렇게 험한 길은 아닙니다.

정 시간이 없다면 동춘당에서 옥류각까지만이라도 걸어봐도 좋겠지요. 평지나 마찬가진데다 거리도 1km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가볍게 바람을 쐬기는 안성맞춤의 코스가 아닐까 합니다.

바구니 옆에 끼고 이 길을 따라가면서 산수유 등 봄꽃도 구경하고 쑥이나 달래 등 봄나물도 캐면 그야말로 일석삼조가 아닐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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