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55회

등록 2007.03.20 08:20수정 2007.03.2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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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교학은 자신의 거처에 있지 않았다. 그는 신태감이 살해된 이후 계속 동창의 인물들이 머물고 있는 청룡각에 머물고 있었다. 함곡과 풍철한은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변명할 거리라도 찾으려면 어차피 살해현장을 다시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두 사람을 맞이한 인물은 살해된 서당두를 대신해 실무적인 책임을 맡고 있는 번역(番役)인 하종호(河宗悟)였다. 그는 곧 추교학에게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는 경후(卿珝)도 같이 있었다. 이미 신태감의 죽음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났는지 매우 단정하고 표정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좀 알아낸 것은 있으신 게요?”

함곡과 풍철한이 자리를 잡고 앉자 경후가 물었다. 경후의 태도는 어제 보여준 것과는 달리 놀랍도록 변해있어 두 사람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밥만 축내고 있지요. 그래서 오늘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볼까 합니다.”

함곡이 힐끗 추교학을 보았다. 그것은 추교학을 조사하러 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미 추교학 역시 쇄금도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들은 바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터였다. 풍철한이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자 추교학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소생이 서향을 사용하는 것은 맞소.”

그러니 과장되게 냄새 맡는 척 하지 말라는 얘기다. 풍철한이 추교학을 보고 씨익 웃자 추교학은 그렇지 않아도 심기가 불편하던 터에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나타냈다.


“이야기가 쉽게 풀려갈 것 같구려.”

함곡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혹시 그젯밤 진가려란 여인의 방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에 계시면서 살해현장을 목격하시지 않았소?”

함곡의 질문은 엉뚱하기도 하고 교묘하기도 했다. 차라리 ‘그젯밤 어디에 계셨소?’라고 물었다면 대답이 쉬었을 것이다. 함곡은 이미 추교학이 진가려란 여인의 방으로 통하는 비밀통로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은근히 압박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있었다 해도 추교학이 범인이 아니라 목격자임을 부각시켜 쉽게 대답이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근거가 있거나 물증이 있어 추교학을 목격자로 몬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서향을 사용하는 사람 다섯 중에 이미 세 사람은 특별한 혐의를 둘 수 없으니 결국 추교학이 아니라면 궁수유였기 때문에 넘겨짚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은 추교학의 태도가 이상했다. 그의 성격이라면 무슨 말이냐고 당장이라도 부인 할만한데 오히려 미세하게나마 당혹스런 기미를 보인 것이다. 허나 곧 표정을 회복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르는 일이오.”

허나 그러한 이상한 기미를 놓칠 함곡이나 풍철한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경후마저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대답 역시 애매해 얼버무리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경후는 추교학이 함곡의 교묘한 질문에 말려들었음을 알았고, 자신이 모르는 일이 추교학에게 있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더욱이 함곡의 입가에 떠오른 옅은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보지 못했다는 것이오? 아니면 범인을 모른다는 말이오?”

“보지 못했고….”

추교학은 대답을 하다가 당황한 기색을 띠며 말문을 닫았다. 대답은 보지 못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미 그 전제를 둔 그 현장에는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 버린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역시 노련함은 글이나 말로 배워서 될 것은 아니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세월의 흔적으로 남는 경험이 최고의 스승일 수 있었다.

“지금 함곡 선생께서는 추공자를 쇄금도 살해범으로 몰려는 것이오?”

보다 못한 경후가 나섰다. 잠시 후면 추산관 태감이 들어온다. 추 태감이 들어오면 모든 상황은 확 바뀔 것이다. 운중보에 들어와 서당두와 신태감의 잇따른 죽음으로 위축되는 정도가 아니라 난생 처음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 느끼고 있었던 경후로서는 추 태감이 들어올 것이라는 전서구를 받은 어제 저녁부터 제 정신을 차리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추교학이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청룡각에 머문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경첩 형께서도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추공자는 현장에 가 있었소. 허나 본인은 추공자가 범인이라고 말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실제 추공자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나는 지금 흉수를 잡기 위해 추공자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지 흉수로 몰려는 것이 절대 아니오.”

점입가경이었다. 이미 함곡은 다른 때의 신중함과는 달리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순간에 달려들어 노루의 숨통을 문 표범처럼 그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경후에게서 추교학 쪽으로 넘어갔다.

추교학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리 어리고 경험이 없어 감정을 숨길 줄 모른다 해도 이리도 쉽게 상대의 술수에 말릴 어수룩한 자는 아니었다. 또한 함곡의 질문이 매우 교묘했다고는 하나 그런 정도는 이미 예상할 정도의 눈치는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더구나 추교학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한 아이로 평판이 나 있는 터였다. 그럼에도 그가 아주 간단한 유도신문에 걸려들었음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것은 그럴만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잠시 추교학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결정한 듯 물었다.

“내가 그곳에 갔던 사실은 어떻게 아신 것이오? 연청(燕靑)께서 알려주신 것이오? 아니면 다른 자가 그런 것이오?”

되묻고는 있지만 명백한 인정이었다. 연청은 바로 좌등의 수하인 진운청의 호. 그를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풍철한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함곡이 단정적으로 추교학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몰아가는 것도 그랬고, 거기에 당황하며 순순히 인정하는 추교학을 보면서도 그랬다. 도대체 함곡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조사하는 입장에서 어찌 그런 사실까지 밝힐 수 있겠소?”

조사방법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제는 더 이상 조사를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능히 이해가 가는 말이었다. 허나 이 대답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 조사에 있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는 경후마저도 함곡이 정말 뭔가 근거를 가지고 추교학을 추궁한 것인지, 아니면 넘겨짚고 추궁해 간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추교학은 답답했다. 진운청이 알려주었다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다른 자가 알려주었다면 그 자를 꼭 알고 싶었다. 바로 그 자가 자신을 이런 곤경에 빠지게 한 자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추궁할 입장은 아니었다.

추교학은 곤혹스러움을 역력히 내비치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모습은 흔히 여인네가 곤란할 때 보이는 버릇이었는데 여장이라도 시켜 놓는다면 여자로 착각할 만한 곱상한 얼굴을 가진 추교학이 그런 모습을 보이자 정말 여자를 남장시켜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좋소. 내가 어찌 그곳에 갔는지 자세한 연유를 말씀드리겠소. 지금 생각하면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소.”

추교학은 그제 저녁 자시(子時) 초, 왠지 불안한 마음에 자신의 거처에서 홀로 술을 몇 잔 마셨다. 반드시 보주의 후계를 자신이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자 신태감이라도 만나 보려 청룡각에 가려고 거처를 나서는 순간 지붕 위에서 암기가 쏘아왔던 것이다.

“극독이 묻어 있는 매화침(梅花針)이었소. 그것을 가볍게 피하며 상대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또 다시 매화침과 철연자(鐵蓮子)가 뒤섞여 우박처럼 쏘아져 내렸소.”

허나 어찌 암기 따위에 당할 추교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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