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이 정말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대전광역시기념물 제8호 질현산성과 제21호인 고봉산성

등록 2007.03.26 16:10수정 2007.04.15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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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청호에서 바라본 질현산성과 고봉산성

대청호에서 바라본 질현산성과 고봉산성 ⓒ 김유자


질티 혹은 질현 고개에 대한 유래

치(峙)와 현(峴)은 고개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현은 규모나 교통량에서 령보다는 낮은 급이며 지방 중소 산지의 고갯길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치는 고개가 통과하는 산지가 다소 험준한 느낌을 주는 곳이지 꼭 산지가 높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뚜렷한 고개를 부르는 기준은 아직 뚜렷하게 밝혀져 있지 않고 령, 치, 현 등의 용어들이 혼용되는 경향이 많은 듯 합니다.


질현산성은 질티고개 위에 있습니다. 땅이 질퍽거리는 고개라하여 질티고개라 불렀다고 합니다. 실제로 언땅이 녹기 시작하는 봄철에 이곳을 지나노라면 유난히 질퍽거려 신발에 흙이 많이 묻는 걸 느낍니다.

a 등산로가 된 동쪽 성벽

등산로가 된 동쪽 성벽 ⓒ 김유자


a 안팎을 다 돌로 쌓은(내외협축) 동벽. 석루가 있었던 곳인 듯 합니다.

안팎을 다 돌로 쌓은(내외협축) 동벽. 석루가 있었던 곳인 듯 합니다. ⓒ 김유자


가양공원 안으로 들어가서 오르막길을 1km가량 올라가면 고개에 이르면 거기에 이정표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정표에서 400m가량 산 북쪽으로 올라가면 질현성의 남쪽에 이르게 됩니다. 보현사라는 절집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대전광역시기념물 제8호 질현산성의 동벽이 나타납니다.

성벽은 주위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노란 생강나무 꽃무더기에 묻혀 느닷없는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진달래꽃도 여기저기 피어나기 시작해서 딱딱한 돌 뿐이던 성벽이 화사해집니다. 여기서부터 북벽 끝까지 성벽을 따라서 등산로가 쭉 뻗어 있습니다. 그 등산로를 따라서 건들거리듯 걸어 갑니다.

질현성은 둘레가 800m 정도라고 합니다. 계족산성보다는 조금 작고 안산동산성보다는 약간 큰 성인 셈입니다. 봉우리를 따라 축조된 성벽의 대부분은 바깥을 돌로 쌓고 안은 흙이나 잡석으로 채운, 이른바 외축내탁으로 쌓은 석축산성이지요. 그러나 고봉산성의 맞바라기에 위치한 동벽의 일부에서는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내외협축의 흔적도 블 수 있습니다.

a 동벽에서 북벽으로 굽어드는 지점에 있는 온전히 남은 성벽

동벽에서 북벽으로 굽어드는 지점에 있는 온전히 남은 성벽 ⓒ 김유자


약 50m가량 북으로 가면 동벽에서 북벽으로 구부러지는 지점이 나오는데 거기 기적처럼 3m~4m가량의 높이로 지금껏 온전하게 남아 있는 성벽이 있습니다. 고대 축성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지요.


석재를 장방형으로 가공하여 외면을 맞추어 쌓은 매우 단정한 모범생같은 성벽입니다. 아래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 쌓으면서 요소 요소에 조그만 돌로서 쐐기를 박은 흔적도 있네요.

a 봉수대에서 무너져내린 걸로 보이는 북벽의 이끼낀 돌들

봉수대에서 무너져내린 걸로 보이는 북벽의 이끼낀 돌들 ⓒ 김유자


a 북벽 쪽에서 바라본 대청호

북벽 쪽에서 바라본 대청호 ⓒ 김유자


a 북벽 근처에서  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본 국가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

북벽 근처에서 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본 국가 사적 제355호 계족산성 ⓒ 김유자


북쪽으로난 등산로를 따라가다 보면 허물어져 돌무더기로 남아 있는 북벽을 볼 수 있습니다. 북벽 가장 높은 곳에 이르면 봉수대 자리로 추정돼는 푹 꺼진 지점이 나오는데 아마 봉수대를 쌓았던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돌은 와르르 허물어져 무더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북쪽으로 7km가량 떨어진 계족산성이 육안으로도 아주 가깝게 잘 바라다 보입니다.

a 석축은 허물어졌지만  윤곽이 뚜렸한 서벽

석축은 허물어졌지만 윤곽이 뚜렸한 서벽 ⓒ 김유자


북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고개가 나옵니다. 오른쪽으로 뻗은 오솔길을 따라서 서벽으로 갑니다. 서벽은 온전하게 남은 성벽은 없습니다. 그래도 석축의 안쪽에 흙을 쌓았던 윤곽만은 뚜렸이 남아 있으니 바로 아래로 쏟아져내린 돌무더기와 함께 옛 성벽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데는 충분합니다.

안산동산성이나 적오산성은 서쪽이 낮은 데 이 질현성은 남쪽이 낮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서벽에 매우 가깝게 위치한 남문지 근처엔 지금도 주민들이 경작하는 밭이 있고 바로 위로는 건물지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또 남문지에서 동쪽으로 약 200m가량 떨어진 지점에는 지금도 주변 10m가량이 항상 습지처럼 축축히 젖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아마도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끌어들여 물의 속도를 줄이므로써 성벽을 보호하고자 연못을 팠던 자리가 아닌가 추측됩니다.

a 돌탑이 돼버린 보루의 변신은 무죄일까요?  한 등산객이 돌탑에 돌을 쌓고 있습니다.

돌탑이 돼버린 보루의 변신은 무죄일까요? 한 등산객이 돌탑에 돌을 쌓고 있습니다. ⓒ 김유자


한편 북쪽으로 이어지고 있는 능선으로 계속가면 6개의 크고 작은 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로 쌓은 작은 성)가 있습니다. 본성인 질현성으로부터 불과 200여m 거리 안에 집중적으로 설치돼 있는 6개의 보는 질현성의 위치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쌓은 작은 성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루들은 지금은 단지 몇 개의 돌탑으로 변해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서 한적한 등산로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면 돌의 인생도 사람의 인생 못지 않게 유전을 거듭하는가 봅니다.

지라성으로 비정되는 질현성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질현 재현동 십이리(迭峴 在縣東 十二里)'라 하였으며 조선 순조 때 편찬된 정부의 재정과 군정의 내역을 모아 놓은 <만기요람> 군정편에도 이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질티(迭峙)가 옛날 회덕에서 동쪽에 위치한 옥천으로 넘나드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고개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가까이 대전-옥천 간 국도가 지나가고, 질티고개 옆 터널을 통과하는 경부고속도로는 바로 옥천으로 이어지고 고개 아래 땅밑으로 뚫린 대전터널을 통과해 대전-옥천간 우회도로가 지나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전-옥천을 잇는 중요한 길목이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는 셈이지요.

이 산성의 동으로는 불과 250여m 거리에 있는 고봉산성이 마주하고 있고 대청호 건너편 멀리 백골산성이, 동북쪽으로는 견두성이 있는 개머리산이 바라다 보입니다. 질현성은 질티고개의 북쪽에 위치하여 옥천 쪽에서 넘어오는 적을 감시할 목적으로 축조된 성으로 보여집니다.

<삼국사기> 등 여러 문헌을 분석해보면 질현성은 백제부흥군의 주요 거점 중의 하나였던 지라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자왕 용삭 2년(662) 7월 조에는

"인원과 인궤 등은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들을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 및 윤성과 대산책·사정책 등의 목책을 함락시켜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곧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책이란 말뚝을 땅에 박고 가로 세로로 엮어 설치한 방어시설로 성의 가장 원시적 형태를 말합니다.

당나라에 대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되는 송나라 때 편찬된 <책부원구>에도 "마침내 인원과 인궤는 몰래 경계치 않고 있는 지리성과 윤성, 대산, 사정 등의 책을 쳐서 빼앗고 많은 사람을 잡거나 죽였다. 그리고 군대를 나누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대전 향토사료관 자료 인용).

지라성이 차츰 "지리-질"로 음운 변천을 거쳐왔다고 볼 때 지라성 혹은 지리성, 질현성은 똑같은 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질현성이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지라성이든 아니든간에 그 전략적 중요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a 고봉산성에서 애써 찾아낸 석축

고봉산성에서 애써 찾아낸 석축 ⓒ 김유자


성을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온전한 성벽이 남아있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성벽 아래로 250여 m가량 떨어진 고봉산성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고봉산성은 북쪽에 있는 견두산성처럼 거의 자취를 찾을 길이 없습니다.

304m의 고봉산 봉우리에 쌓여져 있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 둘레는 약 250m이다.

고봉산성은 위치로 보아 질현성의 자성(子城)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사한 시점이 어느 때인지는 모르지만 대전 향토사료관 자료는 고봉산성의 모습을 이렇게 전합니다.

돌로 쌓은 구조물이라고 해서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저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삶의 자취를 기록하는 게 습관이 돼 있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숙제 검사 때문에라도 일기를 쓰지만 그 이후엔 일기를 쓰는 사람도 드뭅니다. 그런 탓인지 우리나라의 역사 기록도 그리 풍부하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조정의 주요 신하들이 피란하여 청군과 대치했던 남한산성에서의 50여 일 동안을 날짜 별로 기록한 <산성일기> 같은 자료는 매우 희귀한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산성의 가치라면 이렇게 빈곤한 역사 자료를 메꾸는데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성에서 발굴되는 그릇이나 기와 그리고 성돌들은 당시 민중들의 생활을 미루어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은 산성이 결코 흘러간 과거의 거추장스런 구조물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결코 가벼이 여기거나 소홀히 대접받을 유적이 아니라는.

몇 년 전부터 대전광역시기념물 제8호 질현산성 내에는 각종 구조물들이 들어앉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질현산성 남문지 근처에 세워져 있던 고봉산성 표지석은 누군가에 의해 조각난 채 버려져 있습니다.

돌로 쌓은 구조물이라고 해서 상처가 없는 것은 아닐 겁니다. 그저 돌이 입는 물리적 상처가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의 손상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요.

덧붙이는 글 | 23일에 다녀왔습니다.

☞찾아가는 길
①가양공원 입구에서 오른쪽 포장도로 → 산 중턱 오르막 3거리에서 좌측 길(우측은 옥천 가는 우회도로) →고개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질현산성

②우암사적공원→바탕골약수터→북쪽 능선→질현산성

덧붙이는 글 23일에 다녀왔습니다.

☞찾아가는 길
①가양공원 입구에서 오른쪽 포장도로 → 산 중턱 오르막 3거리에서 좌측 길(우측은 옥천 가는 우회도로) →고개에서 이정표를 따라 좌측으로→질현산성

②우암사적공원→바탕골약수터→북쪽 능선→질현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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