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서 5만원씩 4년 동안 넣은 '환갑계'

서랍 속에 넣어둔 통장을 보니 가슴이 벅찹니다

등록 2007.03.28 15:18수정 2007.03.30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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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라고 하기엔 상쾌함이 부족하고 여름 비라 하기엔 너무 이른, 참 애매한 가랑비가 며칠 동안 오다 말다 반복하고 있습니다. 새색시 종종걸음처럼 아주 조용하게 말이지요. 후텁지근한 기운에 널어놓은 빨래는 축축함이 스며 있고 몸뚱이는 끈적거리고요. 참 짜증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만, 요즘 제겐 이런 기분쯤 금세 날려버릴 수 있는 즐거운 일이 있습니다.


며칠 전, 세 살 난 둘째 딸내미랑 블록놀이를 하며 놀다가 한국에 있는 둘째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시집가서 애들 키우는 같은 아줌마다 보니 얘기하다 보면 참 잘 통하거든요.

"어, 나야. 뭐해?"
"언니? 말도 마. 요새 애들이랑 나랑 다 감기 걸려서 죽을 맛이야. 언니는 괜찮아?"
"나야 뭐, 잠깐 감기 기운 있다가도 멀쩡하고 그래. 워낙 건강하잖냐."
"참, 언니 우리 이번 달에 아빠 환갑계 4년 된 거 맞지?"
"아참, 벌써 3월말이네? 맞다 맞어.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전화 끊자마자 서랍 속에 넣어둔 통장을 얼른 꺼내봤습니다. 4년 전, 그러니까 2003년 이맘때 첫딸 소연이를 낳고 시골 친정집에 있을 때였어요. 면 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에서 일하는 아는 분께 딸내미 앞으로 3년짜리 적금을 넣었습니다. 그 적금을 넣으면서 시집간 둘째, 직장 생활하던 셋째와 상의 끝에 친정아버지 환갑을 목표로 5년짜리 적금통장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2003년 3월에 시작한 환갑계 통장입니다.
2003년 3월에 시작한 환갑계 통장입니다.전은화
오남매가 같이 모으면 더 좋았겠지만 넷째와 막내는 그 당시 학생이어서 그냥 세 자매끼리 매달 5만원씩 통장에 넣었습니다. 넣는 동안 결혼한 동생은 아이들 키우는 주부인지라 가끔 날짜를 놓치곤 했는데, 그럴 땐 제가 먼저 채워넣고 나중에 동생이 넣어주곤 했습니다. 셋째는 월급을 받으면 그 돈을 먼저 때맞춰 넣어주었고요. 그 덕분에 지금까지 꾸준히 모을 수 있었습니다.

적금을 넣을 당시 아버지 연세 56세였으니 4년만 넣으면 되는 거였지만 별 생각 없이 우체국 상품 중에 5년 만기 1000만원짜리를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엔 그냥 넣다가 아버지 환갑인 4년차에 필요하면 해지하여 쓰자는 아주 간단한 생각으로 시작했지요.


몇 달 전 우체국에 일이 있어 전화했다가 마침 생각난 적금 건을 상의드렸습니다. 그분 말씀은 자매 중 한 사람이 4년분의 금액을 대체하고 적금은 만기까지 계속 이어가는 게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듣고 보니 해지하자니 못 받는 이자가 좀 아깝긴 했습니다. 그렇게 혼자 생각만 하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이만큼 지나 이달 말로 벌써 4년이 된 겁니다.

첨엔 맞이인 제가 그 적금을 인수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아직 적금을 못 들고 있는 둘째가 인수하겠다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완전한 만기는 아니지만 동생들과 약속했던 기간이 끝났으니 어쨌든 만기는 만기지요.


여하튼 꽤 오랜 시간 고이고이 서랍 속에 모셔져 있다가 드디어 빛을 바래는 통장을 보니 왜 그리 뿌듯하던지요. '5만원'이란 금액이 적다면 참 적은 돈이지만 셋이서 모으니 4년 동안 700만원이 모였습니다.

맏이랍시고 멀리 있어서 동생들 잘 챙기지도 못하는데 그럼에도 전화 한 통이면 무슨 일이든 바로바로 처리하는 둘째가 있어 항상 든든하고요. 애들 키우며 살기 바쁜 시집간 언니들 대신 친정에 매달 생활비를 보내며 농사짓는 부모님께 든든한 딸 역할을 다하는 셋째 또한 참 믿음직스럽습니다.

시골집 방 한 칸에서 잠잘 때마다 부대끼며 새우처럼 구부려야 겨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엔 5남매가 참 많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것 같지도 않고요.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부모처럼 언제든 발벗고 나설 수 있는 그 진한 핏줄로 맺어진 형제자매가 다섯이나 된다는 게 참으로 좋습니다.

동생들에게 고맙기도 하고 통장을 확인하니 괜히 기분이 둥 떠서 또 둘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야, 진짜 맞네. 이달까지면 딱 4년이 맞더라. 니들 고생했다, 진짜."
"언니가 애썼지 뭐. 근데 아빠 환갑 선물은 뭐해드릴까? 집에 보니까 세탁기도 오래되었고, 참 아빠 이도 안 좋으신 것 같애. 아 그리고 언니, 아빠 캠코더 하나 해드리면 어떨까? 그거 갖고 싶어하시는 눈치던데…."
"그러냐? 아, 맞다. 야, 아빠 오토바이 말야…, 그것도 엄청 낡았잖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타시던 거니까…, 하하하 우리 리스트 먼저 뽑아야 되지 않겄냐?"
"하하하, 그러게 9월이니까 아직 환갑 돌아오려면 멀었는데…."


동생이랑 통화하는 내내 행복한 고민을 하느라 수다가 참 길었습니다. 해드릴 게 많으니 고민이고요, 뭔가를 해드릴 수 있으니 참 행복합니다. 그나저나 그걸 받으시고 깜짝 놀라실 울 아버지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니 저절로 웃음이 납니다. 앞으로 몇 달 남은 환갑 때까지 우리 자매의 행복한 고민은 아마도 계속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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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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