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자식들에게 유산을 남겨주고 싶다

등록 2007.03.31 16:32수정 2007.03.3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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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한 시대를 통틀어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 아니고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러면 나머지 새털 같이 수많은 군중들은 무엇을 남길까?


그야 말 할 것도 없이 자식이다. 말 못하는 미물도 제 새끼 남기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야. 그저 잘났든 못났든 대대손손 내려 온 제 핏줄 지키려고 눈에 불을 켜고 안간힘을 쓰다 죽는 게 우리 같은 범부의 한 평생이다.

길어봤자 백 년을 넘기 어려운 인간의 한 평생. 40 넘기기가 무섭게 그야말로 살같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세월이다. 그 짧은 세월에 이루고 싶은 꿈은 얼마일 거며 채 풀지 못하고 쌓인 한은 또 얼마큼이겠는가.

자신이 못다 이룬 꿈, 그 꿈을 자식에게 이루고 싶다는 소망은 모든 인간이 포기 못하는 본능일진대 그래서 사람들은 내 꿈을 이어받을 그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악착같이 벌어 유산을 남겨주려고 난리를 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 자식들은 타고난 복이 지지리도 없어 정말 물려받을 유산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지금 형편에선 나중에 우리 부부가 아이들의 짐이 되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대학 간신히 졸업시키면 그 이후 대책은 전무한 상태이다.

부모 잘 만나 아무 걱정 없이 제 꿈을 찾아 맘껏 비상하는 다른 집 자식들을 보면 내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든다.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이 없다는 안타까움, 그 마음이 들 때마다 어찌나 답답한지 '로또복권'을 사서 대박 터지는 망상에 해롱대기도 했지만 번번이 반찬값만 날리는 헛짓만 하고 쓴 웃음을 삼켰다.


a 와이셔츠 상자 두 개 분량의 편지묶음

와이셔츠 상자 두 개 분량의 편지묶음 ⓒ 조명자

하긴 우리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준비해 둔 유산이 하나 있기는 하다. 아이들 태어나고 2번에 걸쳐 옥살이를 한 아빠가 그동안 주고받았던 편지 묶음을 아이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다는 희망을 석방되기 전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한가지만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당신의 편지들은 우리가 죽어 사라진 후 자경, 인장 두 후예들에게 값진 유산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사랑 그 자체를 솔직하게 세대에서 세대로 전하는 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훗날 어떤 평가를 받든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렵니다. 다만 우리가 애써 살았음을 인정받는 것으로 나는 만족할 생각입니다…"


a 아들이 아빠한테 보낸 편지봉투 "누나는 편지 안썼데요"

아들이 아빠한테 보낸 편지봉투 "누나는 편지 안썼데요" ⓒ 조명자

결혼하고 두 번에 걸친 옥살이 중 주고 받았던 편지들. 와이셔츠 상자 두 개에 가득 담긴 편지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남편 말대로 아픈 현대사의 무게를 나눠지려 했던 민초의 흔적들이,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감동으로 생생이 기록되어 있는 80~90년대 역사의 한 페이지다.

어찌 현대사뿐이랴. 거기에 더 중요하게 담겨진 기록은 한 가족의 개인사다. 없어진 가장 대신 가계를 떠안은 아낙의 고달픔, 아빠 없이 자라는 두 아이의 육아기 그리고 아비에겐 자식의 훈기를, 아이에겐 곁에 없는 아빠의 그림자를 느끼게 하려고 눈에 본듯, 사진에 찍은듯 시시콜콜 아이들의 말썽과 재롱을 써내려간 편지들.

a 아들이 유치원 때 아빠에게 보낸 편지...새로 들어 온 냉장고가 들어 왔어요라는 뜻

아들이 유치원 때 아빠에게 보낸 편지...새로 들어 온 냉장고가 들어 왔어요라는 뜻 ⓒ 조명자

남편 뜻이 아니더라도 내 아이들에게 자랑스럽게 전하고 싶은 유산 중에 하나다. 그런데 그 것 말고 현실적으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그 무엇인가를 남겨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아이들 이름으로 된 '주택 청약저축' 통장.

돈 되는 일엔 어찌나 아둔한지 그 방법도 얼마 전 모임에서 얻어들은 정보다. 모임에서 군대 간 우리 아들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우스개 소리를 하던 후배가 뜬금없이 아들 앞으로 주택 청약저축을 들어줬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이구, 인장이놈이 최전방 화천에 떨어진 것을 보니 아빠 빽이 없구만. 그런데 언니, 아이들 앞으로 청약저축은 들어줬수?"
"응 청약저축? 아니 안 들어 줬는데."
"글쎄 이렇다니까. 하루라도 빨리 가입해야 당첨이 쉽지. 청약저축은 기간과 액수가 많아야 유리해. 우선 언니가 통장을 개설해 매달 얼마씩 저축해 주고 얘들이 취직하면 그 때 넘겨줘. 그러면 부담도 없잖아."

아, 그렇구나. 아이들에게 몫돈을 지원해 줄 능력은 없지만 매달 몇만 원 정도 지원은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청약저축은 공공임대 아파트가 가능하다 하니 새로 시작하는 아이들 주거마련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당장 은행을 찾아갔다. 여차여차 해서 아이들 앞으로 청약저축 통장을 만들고 싶다고 했더니 독립 세대주라야 자격이 있단다. 그래서 다시 동사무소로 갔더니 부모와 같은 주소지 안에선 세대주 분리가 안 된다나. 어쩔 수 없이 아는 친척집으로 위장 전입을 해야 할 판이었다.

a 딸이 보낸 편지, 그 때 <서울뚝배기> 드라마를 봤군요.

딸이 보낸 편지, 그 때 <서울뚝배기> 드라마를 봤군요. ⓒ 조명자

위장전입이 못내 걸려 뭉그적뭉그적거리다 쓰잘데 없이 동사무소 직원에게 한마디 던진다.

"청약저축은 빨리 가입해야 한다는데 우선 이모집으로 옮겨 통장을 개설하고 나중에 다시 와도 되겠죠?"
"그 집에 사는 것도 아닌데, 나중에 발각되면 말소가 되지요."

참, 미련한 데는 약도 없다. 아니 동사무소 직원에게 물어보면 위장전입하라고 하겠나? 터덜터덜 돌아 나오며 남들은 이렇게 저렇게 위법, 탈법도 잘도 하고 살건만 우리 부부는 어째 이 모양이냐 생각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 잘나빠진 '청약저축' 통장 하나 만드는 데도 이렇게 한 발도 나가지 못하다니. 생각만 굴뚝같고 실행은 못하는 내가 한심스러워 여차직하면 저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이 시도 때도 없이 든다.

남들처럼 자식 앞날에 고속도로는 닦아주지 못할망정 기만 원 하는 청약저축 통장 하나 만들어주지 못하랴. 내일 당장 나가 동생네 집으로 아이들 주소를 옮겨야겠다. 나도 내 자식들에게 유산 하나 주고싶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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