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은 넥타이를 풀고 31일 오후 제주신라호텔에 마련된 한.일 외교장관 회담장에 먼저 나온 송민순 외교장관(왼쪽)이 아소 다로 외상을 맞이하고 있다.연합뉴스 김호천
#1. 강풍
한·일 외교장관은 어렵게 만났다.
회담이 예정된 3월31일 오전 제주공항은 강풍으로 비행기 이착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송민순 외교통상부장관이 예약한 제주행 비행기는 오전 9시5분발. 이날 서울에는 가랑비가 뿌리는 가운데 새벽부터 제주로 향했던 비행기가 회항하거나 아예 출발을 못하는 등 결항이 잇달았다. 송 장관이 타려던 비행기도 결국 뜨지 못했다.
아소 다로 일본외상은 오전 9시35분 도쿄 나리타공항을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역시 제주 지역의 악천후로 착륙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고 출발을 연기시키며 기다렸다.
제주 지역의 바람은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조금씩 잦아들 기미를 보였다. 일본측 비행기가 11시30분경 출발을 결정했고, 한국측도 급히 대한항공 임시편을 마련해 12시20분경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송 장관 일행을 태운 보잉 737기는 이날 한반도 전역을 뒤덮고 있던 비구름 때문에 비행시간 50분 내내 몹시 흔들렸다. 하지만 오후 1시반 제주공항에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아소 외상은 10분 뒤 도착했다.
#2. 노타이
오후 3시25분경. 송 장관은 제주신라호텔에 마련된 회담장에 나타났다. 다소 굳은 표정. "좀 편하게 만나려고 (회담장소를) 제주도로 잡았는데 편안하지가 않네." 기자가 다가가 물었다. "날씨 말입니까? 한일관계 말입니까?" 송 장관은 대답하지 않고 아소 외상을 맞이하기 위해 앞으로 두어 걸음을 옮겼다.
한국측 참석자들은 대부분 넥타이만 풀었지 사실상 정장 차림. 송 장관 말대로 휴양지 제주도를 회담 장소로 택한 것은 넥타이를 풀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해보자는 취지였다. 요즘 외교에서 하나의 유행처럼 된 이른바 '노타이 회담'이다. 그럼 좀 더 세련된 캐주얼 차림으로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일부러 이런 '어정쩡한' 복장을 선택할 것일까?
아소 외상이 저쪽에서 다가오고 있다. 캐주얼 차림에 하늘색 셔츠의 깃을 재킷 바깥으로 빼내는 등 한껏 멋을 부린 모습. 송 장관을 보더니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나이스 투 밋츄"(만나서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한다. 그러나 송 장관은 굳은 표정. 서로 악수를 나누며 카메라기자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준다. 두 사람의 표정이 대조적이다.
#3. 신경전
양국 대표단이 테이블에 마주앉은 뒤 송 장관이 먼저 운을 뗐다. "날씨가 안 좋아 비행기 일정을 조정하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작년 12월 일본에 가서 아소 대신을 제주도로 초청했을 때는 과거보다 밝은 미래를 편하게 얘기하자고 한 것이었으나, 그런 미래를 향한 의지가 역사인식 문제로 앞으로 나가기 어렵게 돼있다. 오늘 날씨처럼 기류가 좋지 않다."
여전히 밝게 웃는 표정으로 송 장관의 말을 듣던 아소 외상의 얼굴이 순간 싹 변했다. 송 장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우리 머리 위에 있는 구름과 눈앞의 안개를 걷어내는 책임은 과거 잘못을 범한 세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아소 대신께서 지도력을 발휘해서 마음에서 넓고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힘써달라."
아소 외상이 말할 차례가 됐다. "이번 제주도 방문은 지난해 11월 하노이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만났을 때 초청받은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초청 시점을 굳이 바로잡는 이유는 뭘까? 이미 초반의 환한 표정은 얼굴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는 "2005년 11월 부산에서 APEC이 열렸을 때 반기문 장관을 만난 이후 방한이 실현돼 기쁘다 (사실 아소 외상은 지난해 10월에도 잠시 방한했었기 때문에 사실관계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며 느닷없이 송 장관의 전임자인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회담장에 감돌았다.
이어 "일·한 정부간 고위급 대화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면서 "국가와 역사, 일·한간 문제 등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을 맺었다. 취재진을 물리치고 본격적인 회담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