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유령> 영화 포스터
책을 읽는 중에 인터넷을 통해 영화 <고야의 유령>을 볼 수 있었다. 기대한 대로 영화는 우리의 눈길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하다. 다만 미디어가 전하는 것처럼 고야의 전기를 다룬 영화라기보다는 고야가 살았던 18세기 스페인의 사회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자들은 로렌조 신부와 시대의 비극적 희생양인 아이네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고야가 살았던 시대를 조망한다. 고야의 후기 그림들이 왜 그토록 기괴하고 우울해야만 했는지를 그들을 통해 깨닫도록 해준다.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또한 도덕과 계몽의 시대였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의 존엄을 일깨우는 일대 사건이었다.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은 더 이상 신에게 구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해주었고 무능한 왕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귀족들의 전횡은 피폐한 삶에 허덕이는 민초들에게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식민지 개척으로 넓어진 민중들의 시야에는 온갖 부정한 것들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야가 살던 스페인은 아직 근대의 여명이 동터오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는 여전히 부패한 채로 권력의 중심이었고 무능한 왕정은 간신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실정이었다. 한때 무적함대를 앞세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였던 스페인의 영화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무자비한 폭정과 탄압,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한 유형의 땅이었다.
부패한 (카톨릭)교회는 치부와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이단재판소를 이용하였다. 올바른 신앙을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상은 불순분자를 색출하여 가두는 마녀사냥터가 곧 이단재판소였다.
주인공 로렌조 신부는 바로 그 이단재판소의 책임자다. 첩자들로 하여금 이교도를 색출하고 심문(고문)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문제는 그가 신심을 가지지 못한 사악한 자라는 것이었고, 하필이면, 단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앞에 잡혀온 아이네스(나탈리 포트만 분)가 너무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한 고야의 집에서 보았던 아리따운 초상화의 모델이 이교도의 혐의를 받아 잡혀온 것이다. 고문으로 발가벗겨진 그녀의 눈부신 나신 앞에서는 신의 권능도 무용지물인가, 그는 그녀를 범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석방을 위해 로렌조에게 뇌물과 수도원의 복원을 약속하며 탄원한다. 그러나 로렌조는 궤변으로 그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금지옥엽, 딸을 위해서 무슨 짓인들 못할까(자세한 과정은 독자들의 몫이다).
카메라는 궁정화가로서 왕비와 왕의 가족 등을 그리며 틈틈이 자신의 자화상이나 주문 받은 그림을 그리는 고야의 일상을 쫓는다. 유럽의 패권에 욕심을 낸 나폴레옹의 군대가 해방을 내세우며 스페인을 침공하는 장면들과 그 덕분에 감옥에서 풀려난 아이네스의 미친 문둥이 같은 몰골 그리고 로렌조의 아이를 낳았다는 비사들이 차례로 스크린을 채운다. 또한 사라졌던 로렌조가 프랑스군의 고위직이 되어 교회의 수장을 감금하며 복수하는 반전도 일어난다.
로렌조의 아이를 낳은 감옥에서의 시간에 정신이 멈추어진 아이네스를 위해 고야는 그 존재를 로렌조에게 알리고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러나 야욕에 물든 로렌조에게 그 딸의 존재는 아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수녀원에서 도망친 아이네스의 딸은 알리시아다.
겨우 이름만 알아낸 그 딸이 고야에게 발견된다. 제 어미를 쏙 빼닮은 외모를 고야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인지, 그녀는 공원에서 몸을 파는 창녀다. 영화의 서두에서 천사의 얼굴이 꼭 매춘부 같다는 타박이 왜 삽화로 등장하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절대 왕정 때나 해방군을 빙자하여 입성한 점령군이나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기는 매 한 가지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저 당하고만 살 수 없다는 민초들의 각성이다. 마침내 민중봉기는 일어나고 페르디난드 7세의 왕정을 거쳐 때마침 나폴레옹의 독주에 위기의식을 느낀 주변국들의 결맹(신성동맹)에 의해 영국군이 포르투갈을 거쳐 스페인으로 진격한다.
프랑스군은 패퇴하고 로렌조 역시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 때만은 신은 있었던지 로렌조는 (죄인들이 쓰던) 뿔모자를 써야만 한다.
붓으로 그린 진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