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주 KBS 사장.오마이뉴스 이종호
3일 한미FTA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가 일제히 발표됐습니다. 대체로 '한미FTA가 미국 뜻대로 흘러간 건 사실이지만 이왕 타결된 것, 이제 그대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여론 흐름이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타결'이라고 하는, 하나의 매듭이 주는 효과가 가장 컸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별 의미도 없는 새해 첫날 온갖 결심을 다 하는 것처럼, 한미FTA도 타결로 일단락됐으니 이제는 새로운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한미FTA 내용을 알게 되면 국민 대다수가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저로서는 현재 결과에 별로 실망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진실은 알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그 진실이 언제 알려지는가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한미FTA가 먼 훗날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주제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 후배들은 서민들이 '그때' 겪은 어마어마한 고통의 원인을 다루면서 한탄에 한탄을 거듭할 겁니다. 터무니없는 정책 결정 과정, 일방적으로 밀린 협상 과정, 그리고 그 실체를 파헤치지 못한 언론을 낱낱이 밝히는 과정이 속 시원한 일이기만 하겠습니까?
< KBS 스페셜 >, <피디수첩>, < W >, <시사투나잇>, <쌈> 그리고 뉴스들
그러나 그 후배들은 당시에도 정론직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희열에 찬 흥분을 맛보기도 할 겁니다. 한미FTA 전 과정을 통해 반대 여론이 찬성 여론을 압도한 기간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작년 7~8월입니다. 바로 < KBS 스페셜 > 두 편, <피디수첩> 두 편,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약값 문제를 다룬 < W >, 또 <시사투나잇>이 여러 각도에서 한미FTA를 파헤쳤을 때입니다.
놀란 청와대가 오히려 시청률을 부추기는 '오버'를 하고 급기야 '한미FTA 체결지원 추진위원회'라는, 우리 어법에도 어색한 이름의 조직을 급조해서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을 정도였죠.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물론 그 뒤로도 발군의 이강택 피디가 광우병을 취재해서 또 한 번 국면을 흔들었고 <쌈>도 방송됐습니다만). 금년 초에도 분명히 여러 프로그램에서 취재하고 그림을 만들었지만 제가 기억할만한 '작품'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피디들이 위 프로그램 대부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짧은 스트레이트 기사가 본령인 기자들이 한미FTA 같은 큰 덩치를 다루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또 특집 프로그램에 비해 자료 수집, 분석 기간이 짧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부 쪽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인용할 수밖에 없을 법합니다.
한미FTA 타결 직후의 보도특집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타결 직후의 보도특집들, 그리고 작금의 뉴스들입니다. 저는 '고 3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이제 한미FTA를 웬만큼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런 저까지도 TV만 켜면 바야흐로 '멋진 신세계'의 입구에 와 있다는 환각에 빠집니다. 과연 TV의 힘은 놀랍습니다.
물론 시청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시청율도 나오지 않는 찬반 토론을 집중 편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일 반복된 뉴스에 등장해서 한미FTA를 설명해주는 전문가는 전부 국책연구원 박사들, 재벌 연구소 연구원들, 그리고 찬성으로 유명한 교수들이었습니다. 단지 자유무역의 초보적 논리만 되뇌는 이들의 말을 일반 시청자들은 듣고 또 들어야 했습니다. 이쯤 되면 저 같은 사람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은, 반대자가 없으면 안 되는 찬반토론의 형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깔끔하게 만든 도표들의 수치는 여전히 정부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수치들이었습니다. 지난해 MBC와 KBS의 특집 프로그램들이 허구성을 폭로한 그 수치들이 같은 방송사 뉴스 화면에서 버젓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이 힘들여 작업한 새로운 수치는 보도조차 되지 않았습니다(저는 이 수치가 더 객관적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게 과연 '정론직필'일까요?
3. 언론의 힘, 그리고 역사적 책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