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의 혼을 그리워하다

숭현서원지와 김익희의 묘를 찾아서

등록 2007.04.16 15:56수정 2007.05.0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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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전시광역시 기념물 제27호 숭현서원지에 복원된 건물들. 강당인  입교당(중앙)과 서재(좌)와 동재(우).

대전시광역시 기념물 제27호 숭현서원지에 복원된 건물들. 강당인 입교당(중앙)과 서재(좌)와 동재(우). ⓒ 김유자

여덟 분의 명현을 모셨던 숭현서원

오늘(13일)은 여덟 분의 유림 명현을 모셨던 숭현서원지와 창주 김익희의 묘를 찾아 길을 떠납니다. 두 곳 모두 찾는 사람이 드문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창주 김익희 선생의 묘는 으슥한 산자락에 '위리안치'돼 채 있어 그 존재조차 깊이 망각돼 있는 형편이랍니다.


먼저 숭원서원지를 찾아갑니다. 숭현서원은 유성구의 원촌동 원촌 삼거리 뒷편 해발 181.1m 우성이산에서 남동으로 세 갈래로 뻗어내린 구릉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엑스포공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이지요.

처음에 숭현서원은 중구 용두동 일원으로 추정되는 용두록에 새웠졌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09년(광해군 원년) 송남수가 이곳에다 다시 세우면서 삼현서원이라 했는데 그 해에 나라로부터 숭현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고 합니다.

숭현서원은 본래 회덕의 명현 충암 김정, 수부 정광필, 규암 송인수 세 명현만을 모시는 사우였습니다.

김정(1486∼1521)은 16세기 신진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조광조와 더불어 성리학에 입각한 지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다가 귀양을 가 제주에서 사사되었던 분입니다. 송인수(1487∼1547)는 중종 때 김안로의 재집권을 막으려다가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김안로의 몰락 후에 중앙에 복귀하여 대사성에 올랐을 때 외척인 윤원형을 견제하다 사사되었던 분입니다.

또 정광필(1462~1538)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구하려다가 파직되었으며 뒤에는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묘인 희릉을 잘못 쓰게 했다는 김안로의 무고 때문에 김해에 유배되기도 했던 분이랍니다. 세 분 모두 학식이 뛰어나면서도 강직한 분이라 할 수 있지요.


인조 19년(1641)에는 죽창 이시직과 야은 송시영을 위한 별사가 따로 지어져 배향 되었습니다. 사계 김장생의 제자였던 두 분은 정묘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싸웠으며 병자호란 때는 강화도로 피난간 왕자들을 수행하며 적과 싸우다가 강화도가 함락되자 적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기로 결의한 후 죽음을 택했던 분들입니다.

a 입교당 뒤편에 자리한 사당과 별사.

입교당 뒤편에 자리한 사당과 별사. ⓒ 김유자

세 분의 뒤를 이어 사계 김장생과 그의 제자인 동춘당 송준길과 우암 송시열이 차례로 배향되므로써 모두 여덟 분을 모시게 되었으므로 팔현묘라고도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서원에서 송담 송남수와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도 강의한 적이 있을 만큼 숭현서원은 지역 학문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충현서원도 헐려서 묘정비만 남은 채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던 것이 1994년 대전보건전문대학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실시되고 1994년 대전광역시에 의해 사당, 강당, 동재, 서재와 문루인 영귀루 등이 복원되었습니다.

동재와 서재 사이엔 묘정비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비는 2001년에 기존의 비를 모사해서 세운 것이라 합니다. 본래 숭현서원의 묘정비는 1667년(현종8년)에 강당 앞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비문은 본문을 신흠이 짓고 추기를 송시열이 지었으며 글씨는 송준길이 썼다고 합니다.

a 숭현서원의 문루인 영귀루.

숭현서원의 문루인 영귀루. ⓒ 김유자


a 영귀루에 올라서 본 풍경. 계족산과 우술성이 있는 산이 보입니다.

영귀루에 올라서 본 풍경. 계족산과 우술성이 있는 산이 보입니다. ⓒ 김유자

서원의 통문이자 누각인 영귀루

영귀루는 회덕읍지에 '즉숭현서원문루 통상유경치'라 했듯이 숭현서원의 중층 문루이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서원에 통문을 누각으로 세운 것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서원만이 가진 독특한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서원의 정문을 누로 지었을까요? 그 이유가 확실히 밝혀지진 않았으니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제가 추측하기로는 시짓기를 좋아해서 대전의 경관에 대한 시를 많이 남긴 송담 송남수가 이 서원을 다시 지으면서 시우(詩友)들끼리 시를 주고받는 공간으로 활용하려고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원 바로 앞엔 갑천의 맑은 물이 흘러가고 바로 정면엔 회덕의 진산인 계족산이 한 눈에 바라다 보였을 것이니 이 누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며 흥이 도도해지면 시를 지었을 것이라는 걸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숭현서원이 '복원'된 사당, 강당, 동재, 서재 등을 적극 활용해서 선조들의 충절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 되길 기대하며 창주 김익희 선생의 묘로 향해 갑니다.

a '창주사적공원' 입구.

'창주사적공원' 입구. ⓒ 김유자


a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  김익희의 묘.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5호 김익희의 묘. ⓒ 김유자

창주 김익희(1610~1656) 선생의 묘와 재실인 긍사재는 국립중앙과학관 뒤 대전과학교육연구원 뒷산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전과학교육연구원 건물 뒤로 돌아가면 언덕 위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 있고 '창주사적공원'이라고 쓰여진 묘소 입구가 나옵니다.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으슥한 곳에 굳이 '공원'이라 이름 붙인 이유가 뭘까요? 공원처럼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라는 뜻일까요? 대전과학교육연구원과 어깨를 맞댄 곳에는 학생들이 많이 찾는 화폐박물관이 있습니다.

이곳까지 걸어서 2~3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지요. 그 어림에 안내판이라도 하나 세워둔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것 같은데 대전시는 공원이라는 이름 하나 붙여놓고서 "고추먹고 맴맴"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창주 김익희를 시민들로부터 '위리안치'시켰다는 걸 언제나 깨달을는지요.

창주 김익희는 사계 김장생의 손자이며 참판을 지냈고 나중에 영의정을 추증받은 허주 김반의 둘째 아들입니다. 1636년 초 청나라가 멋대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사신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위협하자 창주는 이를 배척하며 청과의 관계를 끊자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해 겨울에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지금 화(和)라는 글자로 임금께 말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죄를 준 뒤에야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라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모시고 들어가서는 독전어사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어머니 서씨부인과 아우 김익겸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음을 전해 듣고 원통해 하면서 그는 청나라를 평생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겼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익희는 노산군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1653년엔 효종에게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단종의 묘소에 제사드릴 것을 주청하여 윤허를받아 시행하기도 합니다. 강인함 뒤에 숨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지요.

그는 당시로서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나이인 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은 뒤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문정공 시호를 받았습니다. 신도비의 글은 그와 평생 친구로 지냈던 우암 송시열이 지었으며 글씨는 죽천 김진규와 곡운 김수증이 썼습니다.

공은 총명하고 뛰어났으며 맑고 넓으며 통달하였다. 일찍부터 가정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작은 일에 절절하지 않았으나 큰 체재는 탁연하였다. 가장 좋아한 것이 <송조명신록>이었는데 항상 본조의 풍속이 당시와 흡사하다고 여겨 늘 그 중에서 가장 순정한 것을 뽑아 마치 자기의 말인 것처럼 외웠으며 스승의 법으로 여겼다.

강화도의 변란이 있은 뒤에 사람들이 벼슬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고 말하였는데 공이 말하기를 "원수가 적국에 있으면 반드시 나라의 위엄을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자우가 송나라에서 벼슬했으며 옛날 오자서와 장자방이 오나라와 한나라의 힘을 빌리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 신도비 내용 일부 (대전향토사료관 자료)


a 재실인 긍사재. 지붕 합각에 쓰여진 '예'자가 이채롭습니다.

재실인 긍사재. 지붕 합각에 쓰여진 '예'자가 이채롭습니다. ⓒ 김유자


a 묘역 입구의 덤불 속에는 깨어진 하마비가 숨겨져 있고 신도비를 두르고 있던 돌난간도  부서져 나뒹굴고 있습니다.

묘역 입구의 덤불 속에는 깨어진 하마비가 숨겨져 있고 신도비를 두르고 있던 돌난간도 부서져 나뒹굴고 있습니다. ⓒ 김유자

조선 선비의 혼을 그리워하며

창주의 무덤가는 조용해서 앉아 있기 좋습니다. 경주 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도래솔처럼 멋진 소나무들이 나그네를 사색의 오솔길로 인도합니다.

1960년대, 금강의 시인 신동엽은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라고 예언자적 목소리로 역사에 대한 믿음을 노래했습니다. "금일에 반드시 굽혀 저들에게 늘어가느니 차라리 올바름을 얻어 죽고 말 것이다"라며 외세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던 창주 김익희 역시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믿음과 민족적 자긍심이 없었다면 어찌 그렇게 단호하게 결사항전을 주장할 수 있었겠는지요?

그가 오늘날에 태어났다면 그는 중앙 정치무대의 어느 정파에 속해 있을까요? 그리고 한미FTA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필연적인 국제화의 조류라고 덥석 받아들였을까요?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하기 쉬운 것에 손을 내밀고 나서 나중에 그 부끄러움을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변명을 늘어 놓습니다. 자기 변명이 강한 사람은 결코 시련을 당차게 극복해나갈 수 없습니다.

극복보다는 변명거리를 찾는 편이 훨씬 수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창주 김익희가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는 끝까지 FTA 반대의 깃발을 든 오른손을 끝내 내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역사는 세상이 깊이 잠들어 있을지라도 조선 선비의 마음은 끝끝내 잠들지 않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 날선 의식이 때로는 논쟁으로 번지기도 하고 때로는 의병으로 떨쳐 일어서게도 했지요. 외세가 새로운 형태로 넘실거리는 때, 지금 같은 때가 바로 창주 김익희 같은 선비의 청청한 목소리를 더욱 그리워지는 순간이 아닐는지요? 역사에서 가정처럼 부질없고 위험한 것은 없겠지요? 그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묘소에서 내려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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