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74회

등록 2007.04.16 08:09수정 2007.04.16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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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운중보 내의 일이라고는 하나 살해된 신 태감은 고위관리였다. 고위관리가 살해되면 그 동네 전체가 몰살되다시피 하는 일이 예사였으니 이런 태도는 다행이라면 정말 다행이었다.

"아는 것은 많지 않으나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엽락명이 대답하자 곽정흠 역시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들의 태도는 추 태감이 묻는 것이라면 모든 것을 대답하겠다는 듯 보였다.

허나 시간이 흐를수록 추 태감은 지루해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세한 상황을 전해주기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정적으로 새로운 사실은 알려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숨기는 것도 없어 보였다.

운중보 내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추측이나 짐작 같은 것은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빠짐없이 보고할 뿐이었다. 추 태감이 의견을 물어보아도 대개는 '알 수 없습니다' 내지는 '그렇게 추측할 수는 있겠지만…' 하고는 말끝을 흐리는 것이다.

"어젯밤 또 다른 두 가지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하던데…."

이제 철담에서부터 서교민, 신 태감과 쇄금도의 죽음까지 모두 들은 들을 만큼 들은 추 태감은 아직 공식화 되지 않은 사건으로 화제를 슬쩍 돌렸다. 그 말에 엽락명과 곽정흠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들어온 지 채 몇 시진도 지나지 않은 추 태감이 그러한 사실까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태도로 보였다.


"험… 문제는 사건이 일어났어도 시신을 치웠고, 아무도 보고를 한 것이 없어서…."

지금까지는 대체로 엽락명이 대답을 했는데 모처럼 곽정흠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철교두가 나갔네. 그는 분명히 본관에게 반교두가 모가두에게 살해되었다는 말을 했네. 자네들은 모르는 사실인가?"

"정황으로 보아 짐작은 하고 있지만 정확히 지켜 본 수하는 없었습니다. 다만 만보적이 데리고 있는 일접사충 중 복(蝮)이란 아이의 죽음은 둘째 공자의 솜씨가 아닌가 합니다."

"둘째공자?"

추 태감의 눈빛이 반짝였다. 여태까지 지루했는데 마침 귀에 번쩍 뜨이는 사실이었다.

"혈간 어른의 조카인 옥공자 말입니다. 속하는 어젯밤…."

곽정흠은 어제의 일을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덧붙이고 뺄 것도 없었다. 곽정흠이 직접 복을 옥기룡에게 넘겼고,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그렇다고 지켜보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군."

추산관 태감의 직관력은 매우 뛰어나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는 말임에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정확히 상황을 추론하고 있었다.

"옥기룡이 틀림없겠군. 헌데 그 사실을 만보적에게 알려주었는가?"

추 태감이 한 질문은 그 의도를 파악하기 애매했다. 당연히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아직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문책을 하는 것도 같고, 은근히 아직 알려주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허나 곽정흠은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하루 종일 상대인의 따님들과 일접사충 중 남은 아이들이 부지런히 사인과 흉수를 조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에게도 와 슬쩍 떠보더군요. 허나 정식으로 보고된 것도 아니고 직접 본 것도 아니라 일단 모른 척 했습니다."

"알려줘…."

추 태감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예?"

"알려주라구. 상만천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게 자네 도리가 아닌가?"

"그러면 자칫 상대인과 옥공자간에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지도…."

"자네는 여기의 경비를 맡고 있는 사람이야. 있는 그대로만 설명해주면 되는 것이지. 그 뒤에 불상사가 일어난다 해도 그들의 몫이 아닌가?"

문책하는 것 같지도 않고 권유하는 것 같지도 않은 애매한 말이다. 곽정흠은 도대체 저렇게 말하는 추 태감의 내심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허나 그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물러가는 즉시 상대인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반교두 건에 대한 자네의 생각은 어떤가? 정말 모가두가 죽인 것인가?"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셋째공자를 그 시각, 그 부근에서 보았다는 수하도 있고, 거처로 돌아가는 것을 본 수하도 있습니다."

추 태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곽정흠 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이 정도로 말하면 거의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헌데 돌연 추 태감은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도대체 팔숙이 누구야? 자네들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엽락명과 곽정흠은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답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누가 말을 하겠느냐는 눈짓이 오고갔는데 결국 엽락명이 입을 열었다.

"이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흠흠… 사실 팔숙이란 존재는 매우 모호합니다. 팔숙이란 말 자체도 누가 먼저 사용했는지 밝혀지지 않았고, 정말 존재하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모른다는 거야?"

추 태감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지자 엽락명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죄송합니다. 팔숙이란 존재를 추측하게 된 것은 십수 년 전 보주께서 우연히 '내가 이 세상에서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유일하게 여덟 명 밖에 없구나. 그들이라면 최소한 나를 배반하지 않을 사람들이지'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팔숙이란 말은 아마 그 말 때문에 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팔숙이 존재한다는 거야? 아니야?"

"죄송합니다.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고, 아니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추 공자가 제자로 입문하기 전이라 제자 네 분과 나머지 동정오우 네 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모두 생각하고 지나갔는데 친구 분들을 두고 말씀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하여 좌 총관이나 귀산 노인 등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점차 부풀려지며 팔숙이란 말이 나왔고, 실제 존재하리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엽락명이 약간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도 떠올리고 있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 엽락명이 말한 내용이 팔숙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설명이 될 터였다. 참으로 팔숙이란 존재는 애매했다. 가끔 세상에는 그 형체가 분명하지 않는데도 자꾸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정말 존재하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팔숙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자 정말 존재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자네도 역시 마찬가지야?"

추 태감이 불쑥 곽정흠에게 물었다. 지금 이 순간 팔숙의 존재 여부를 남들처럼 생각하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추 태감의 입장에서는 팔숙이 정말 존재한다면 지금 운중보 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파악하기 쉬어지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팔숙을 전제로 두고 어떠한 결정을 한다면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저 역시도 다를 바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팔숙은 존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보주께서 믿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는 곧 팔숙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반대로 추론하면 분명 곽정흠의 말이 옳다. 보주가 믿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보주에게 충성하는 사람이란 말과도 같다.

덧붙이는 글 | 여러 가지 격려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내 상태가 아주 좋아져 곧 퇴원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여러 가지 격려 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내 상태가 아주 좋아져 곧 퇴원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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