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인생의 절정기라고?

[TV리뷰] <놀라운 대회, 스타킹>의 40대 동방신기

등록 2007.04.19 20:36수정 2007.04.20 06:45
0
원고료로 응원
a SBS <스타킹>

SBS <스타킹> ⓒ SBS

나는 '미들 에이지'이다. 왜 중년이라고 하지 않느냐면, '중년'이 주는 어감을 참을 수 없기 때문이고 내가 그 어감을 어떤 식으로든 감당할 시기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커서 뭐가 될래?"라는 물음에 언제나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나이가 되면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를 고민했었다. 내가 무슨 예수도 아니면서 33살 이상의 나이가 된 나의 모습을 그려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느 덧 40대가 되었다. 몇 년 전까지, 서른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치닫는데도 나는 내가 여전히 젊은 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징후들이 더 이상 나는 젊은 몸이 아니고 젊은 기억력이 아니며 젊은 마음가짐이 아니라고 각성시키는데도 젊은 세대가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다. '젊음'을 벗어나는 순간 마치 인생의 찬란한 빛은 영영 꺼지기라고 하는 듯이….

믹키유천 보다 멋진 '믹키준진'

SBS <놀라운 대회, 스타킹>(이하 스타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연예인-일반인의 범주 구분은 군인-일반인과 마찬가지로 꽤나 웃긴 것이지만 편의상 쓰자) 일반인들 중에서 끼와 재주, 별난 사연, 혹은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자웅을 겨루어 그들 중의 킹(King)을 뽑는 것이다. 유노정우, 믹키준진, 시아영석, 최강원영, 영웅용석. 이들은 <스타킹> 사상 처음으로 3연승을 달성하며 말 그대로 스타가 되어버린 40대 동방신기 멤버들이다.

한식집 주방장도 있고 마장동에서 정육점을 하는 사람도 있고 비디오대여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동방신기처럼 새파란 오빠들이나 출 법한 격렬한 고난도의 춤을 추자 방청객과 시청자들은 깜짝 놀랐다.

춤의 달인 장우혁이나 멋지게 소화하는 줄 알았던 린댄스마저 거침없이 추자 이들에게 춤이란 그저 장기나 취미가 아니라 필생의 꿈이며 열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믹키준진의 딸이 방청석에 앉아 아빠의 춤을 본 후 믹키유천보다 더 멋있다고 하자 이 어이없는 비교에도 다들 수긍하며 살짝 눈물도 비췄다.


40대 동방신기는 20여 년 전 연예계에서 알아주는 춤꾼들이었다고 한다(어느 기사에 나온 경력들을 보면 그저 빈말이 아님은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정-아마도 좌절이라고 불릴 일들일 것이다-으로 춤을 그만두고 다른 생업을 찾게 되었다. <스타킹> 무대는 오래 전 좌절을 경험하고 꿈을 꺾어야 했던 그들이 "15년 후에 우리 꼭 한 무대에 다시 서자"고 했던 약속을 지키게 해 주었다.

40대 동방신기, 진짜 동방신기와 맞붙다


a 40대 동방신기

40대 동방신기 ⓒ SBS

지난 13일에는 40대 동방신기의 특별무대가 있었다. 진짜 동방신기가 나와서 무대에 함께 섰다. 객관적으로 보자. 진짜 동방신기는 슬림하고 길쭉하니 관리된 몸매에다 훈련된 무대 매너, 목숨 걸고 연습한 춤의 세련된 기교를 갖춘, 정신 나갈 정도로 멋진 '옵화(오빠)'들이다. 이 옵화들하고 시간을 쪼개 틈틈이 연습하는 40대 아저씨들하고 댄스 배틀(춤이나 노래 따위에서, 우열을 가리는 일)을 했다. 어쩌면 체급이 다른 선수들끼리 링 위에 선 것이나 다름없다.

수많은 오락 프로그램에서 젊고 몸매 좋은 꽃미남 옵화들이 댄스 배틀을 하며 저녁 시간을 달굴 때 느긋이 앉아 누가 더 잘 추는지 상관없는 심드렁한 마음으로 보곤 했던 내가 허리를 곧추세워 앉아서 긴장하며 처음부터 승부가 기운 듯한 이 댄스 배틀을 끝까지 지켜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마음은 완전히 40대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열렬히 40대 동방신기를 응원하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들은 붉은 악마보다도 더 간절한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무대 위를 날아다녔고, 나는 젊은 세대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부하고 싶은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인생의 정점은 젊은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아"라고 자연스럽게 말하기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싶었던 것도 인생이 정점에서 내려갈 일만 남은 것 같은 안타까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찬란한 시기를 벗어나 지난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일만 남은 것이 아님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었다.

그것은 40대 동방신기가 3연승하던 날이 아니고, 40대 동방신기와 진짜 동방신기가 한 무대에 서서 대놓고 '젊음'과 '안 젊음'을 비교하던 날이었다.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던 날이었다.

나는야 새로운 꿈을 만들어 낼 '중년'

평소 무료한 주말 오후에 <스타킹>을 보면서 출연자들의 재주와 장기에 감탄하기보다는 TV에 출연해보고 싶은 일반인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 날은 15년 전 좌절 끝에 미련처럼 남긴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준 <스타킹>의 무대가 고마웠다.

꿈을 이루어낸 그들은 전혀 '내려가는' 인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진짜 동방신기의 멤버들을 구분해서 이름과 얼굴을 익히는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던 -그것도 본의 아니게 지루한 반복 학습을 시켜 준 TV 덕분이지만- 나에게 40대 동방신기의 얼굴은 한 사람 한 사람 쉽게 머리에 와서 박혔다.

80년대 청춘 오락 프로그램의 대명사였던 <영 11>의 '짝꿍'으로서 혹은 당대 최고의 가수들의 무대를 빛내 준 백업 댄서로서 춤꾼의 청춘을 살았던 40대 동방신기의 인생에서 최고의 무대는 바로 <스타킹>의 댄스 배틀이 되어 줄 것이다. 젊지 않아도 젊은 사람들보다 더 멋질 수 있음을 자신들도 확인하고 TV를 보는 많은 40대들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니까.

나이를 먹었어도 마음만은 젊기 때문에 멋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 또한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차적인 조건을 젊음에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이 인생의 정점이라고 생각하는 한 멋진 중년이 될 수 없다. 몸도 마음도 젊지 않다 하더라도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을 찾아내고 실현시켜 나갈 힘은 중년이든 노년이든 다르지 않다.

인생은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성장기와 정점을 누리는 짧은 청춘기와 정점에서 내려와 정리하는 나머지 길고 긴 시기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젊지 않아 슬픈 중년이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정점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꿈을 만들어 낼 중년이다.

오히려 크고 작은 좌절들이 젊은 시절의 꿈이었던 화려한 무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더 이야기가 풍부한 무대를 만들어낼 수 있는 힘든 시간들을 가져봤기 때문에 40대 동방신기는 진짜 동방신기가 내뿜을 수 없는 특별한 파워를 발산한 것이다.

나는 중년이다. 아무 문제없다.

덧붙이는 글 | 이현정 기자는 티뷰기자단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현정 기자는 티뷰기자단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3. 3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4. 4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5. 5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